[금융시장 '돈줄'이 마른다] 은행서도 자산가 '뭉칫돈' 이탈…5억원 이상 정기예금 1조 줄어
은행에서는 거액 자산가의 뭉칫돈이 빠져나가고 있다.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고 있어 투자 대상이 마땅치 않은 데다 금융소득종합과세 등 과세 기준이 강화된 데 따른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19일 금융계에 따르면 국민 신한 우리 하나 등 4대 시중은행의 계좌당 5억원 이상인 개인 정기예금 잔액은 작년 말 15조20억원에서 지난 7월 말 13조9682억원으로 1조338억원(6.8%) 줄었다. 이들 은행의 5억원 이상 개인 정기예금 계좌 수도 같은 기간 1만5289개에서 1만3618개로 1671개(10.9%) 감소했다. 5억원 이상 거액을 맡긴 사람들이 은행을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올해부터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이 연간 이자 및 배당소득 4000만원 이상에서 2000만원 이상으로 강화됨에 따라 거액 예금자들이 돈을 빼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현재 1년 만기 은행 정기예금 금리가 연 2% 후반인 점을 감안하면 은행 예금이 5억원 이상이면 연간 이자소득이 2000만원을 넘어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올해부터 자녀나 배우자 등의 차명계좌에 넣어둔 돈에도 증여세를 부과할 수 있게 된 점도 예금 이탈의 원인으로 꼽힌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과세를 피하기 위해 돈을 빼내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은행에서 빠져나온 거액 예금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전문가들은 일부는 다른 투자 기회를 엿보기 위해 머니마켓펀드(MMF) 등 단기 상품으로 옮겨가고 있으며, 다른 일부는 현금화돼 개인 금고로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7월 말 기준 MMF 잔액은 67조2392억원으로 올 들어 4조1000억원(6.4%) 증가했다. 김영훈 하나은행 영업1부골드클럽 PB부장은 “과세를 피하기 위해 일단 금리가 비교적 낮은 MMF로 자금을 피신시킨 후 다른 투자 기회를 엿보는 고객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신분 노출을 꺼린 자산가들이 5만원짜리 현금을 보유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는 추정도 나온다. 세법 개정에 따라 해외 금융계좌 신고 의무를 위반할 경우 제재가 더 강화되면서 해외 계좌에 재산을 숨길 방법도 제한되다 보니 5만원권을 개인 금고로 도피시키고 있다는 설명이다.

5만원권 발행 잔액은 2009년 12월 10조원 규모에서 꾸준히 증가해 올 7월 말에는 37조5000억원으로 늘었다. 그럼에도 은행 영업점에 설치된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서 인출되는 5만원권 수요가 빠르게 늘면서 영업점마다 수시로 5만원권이 부족한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김영도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지금 당장 과세 대상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내야 할 세금이 늘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현금 자산을 음성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