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살까지는 어떻게든 우승해 보려고 술도 끊고 쫓기는 마음으로 자기 관리를 했어요. 잘 안 되더라고요. 50세 넘어선 포기했죠. 그런데 인생 즐겁게 살자고 마음먹었더니 기가 살아나면서 우승까지 했어요.”

‘바둑계 만년 2인자’였던 서능욱 9단(55·사진)이 50대 중반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공격적인 바둑 성향과 둥글둥글한 외모 때문에 얻게 된 별명 ‘반상의 손오공’으로 더 알려진 그는 데뷔 이후 40년간 일반 바둑대회에서 준우승만 14번 했을 뿐 한 차례도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그랬던 그가 만 50세 이상 기사들이 참가하는 시니어 기전 ‘대주배’에서 최근 2연패를 달성했다. 그것도 젊은 시절 ‘벽’으로 여겼던 조훈현·서봉수 9단을 연이어 꺾고 우승했다.

서 9단은 부활 비결을 ‘비움’에서 찾았다. “예전엔 우승에 대한 압박 때문에 항상 불안했어요. 그런데 마음을 비웠더니 지금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무언가 잘될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는 “작년 대주배에서 40년 만에 첫 우승을 했을 땐 인생의 한을 푸는 기분이었다”고 털어놨다. 결승에서 11번이나 패했던 조훈현 9단에게 이겼던 터라 기쁨이 더했다. 그는 “올해 서봉수 9단을 꺾을 땐 저 개인이 잘했다기보다는 팬들의 성원과 집사람 응원이 컸던 것 같다”며 “40년 만에 연이어 우승하니 팬들의 응원이 쏟아졌고 비로소 프로 기사로서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인터넷 바둑으로 실전 감각을 유지한 것도 도움이 됐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는 인터넷 바둑 사이트 타이젬에서 1만승을 거뒀다. “바둑 연습을 하고 싶어도 상대가 없었는데 인터넷 바둑에선 손쉽게 대국을 할 수 있어 좋습니다. 1만승을 했지만 7000번을 졌습니다. 무수한 실전을 통해 새로운 수를 보고 적용하다 보니 내공이 많이 쌓인 것 같아요.” 서 9단은 하루에 인터넷으로 10판 정도를 둔다고 했다.

14세에 입단한 그는 ‘불운한’ 기사였다. 1979년 제4기 최강자전에서 준우승한 뒤 1994년 천원전 준우승까지 결승 대국에서 14차례 무릎을 꿇었다. 조훈현에게 12차례, 이창호에게 2차례 졌다. “결승기에서 계속 질 땐 정말 못 넘을 벽인가 생각했습니다. 정신적인 공황도 왔고요. 우승에 대한 집착을 털어내고 막상 우승까지 하고 나니 악운이 다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습니다.”

‘불운’을 떨쳐낸 서 9단은 이제 새로운 바둑을 시도할 계획이다. “바둑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 돌로 나타내는 사상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엔 전투에만 집중했는데 이제는 두터움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서기열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