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어는 알을 밴 초여름이 제철이라고들 한다. 전남 신안 등 진흙질의 연안에서 게와 새우 등을 먹고 자라 기름지고 영양이 풍부하다. 목포쯤 가야 싱싱한 민어회를 먹는다지만 서울에서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박재순 한국농어촌공사 사장이 서초동 주택가 골목의 ‘유선식당’으로 이끌었다. 연말 술자리와 강추위로 기력이 쇠했을 때는 겨울을 나느라 살을 찌운 민어가 진짜 보양식이라는 것이다.

박 사장은 전라남도 보성 출신이다. 43년간 전남도청에 몸담았으니 호남 토박이다. 지난해 10월 농어촌공사 사장으로 취임한 뒤 ‘고향의 맛’이 떠오를 때는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점심을 한 시간 정도 앞둔 주방에선 목포에서 막 직송된 민어 손질에 들어갔다. 길이가 1m는 족히 되는 몸집에 은빛 비늘이 싱싱하게 빛났다. 아늑한 온돌방에 상을 펴고 앉았다.

○104년 역사 아시나요

농어촌공사의 시작은 1908년 수리조합이다. 오랫동안 국가의 근간산업이었던 농업을 지원하기 위해 농지를 조성하고 저수지 둑을 쌓는 등 다양한 사업을 해왔다. 지금도 농촌지역의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은 지자체와 함께 대부분 농어촌공사가 담당한다. 태풍이 몰아치거나 큰 비가 올 때는 농촌지역의 재해 복구와 예방 사업도 맡는다.

“한국농어촌공사가 104년 된 조직이라고 하면 다들 놀랍니다. 지금은 농업의 산업 비중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전국 곳곳에서 흙을 파고 둑을 쌓는 중요한 일을 하지요. 과거 이름인 ‘농촌진흥공사’는 그래도 다들 한번씩 들어보셨을 겁니다.”

농어촌공사의 사업영역은 그동안 더 불어났다. 1980년대 이후 젊은층이 농촌을 떠나고 빈 집이 늘어가면서 ‘살 만한 농촌 공동체’를 만들어야 할 임무가 더해졌다. 2008년엔 어촌을 사업영역에 포함하면서 한국농촌공사에서 한국농어촌공사로 다시 한번 변신했다. 박 사장은 최근 조직개편을 통해 어촌개발처를 신설했다. 첫 과제로 전남 영광군과 고흥군, 강원도 강릉시에서 ‘어촌마을 공동체 활성화 시범사업’을 벌이고 있다.

○4대강 사업은 마무리 단계

“어촌도 변신하고 있습니다. 관광과 레저, 수산물 가공·유통 등 다양한 산업을 접목시키면서 고소득 어가들이 생겨나고 있고요. 물론 아직 그렇지 못한 어촌도 많아요. 올해는 공사 자체 자금 49억원을 들여서 전국 6개 어촌에 마을복지회관을 지었지요. 휴게실에 사우나도 설치했는데 주민들 반응이 좋습니다. 거창한 사업은 아니지만 보람이 더 커요.”

상 위에 제일 먼저 오른 것은 미식가들이 사족을 못 쓴다는 민어 부레다. 하얗고 주름진 것이 언뜻 곱창처럼 생겼다. 목포에선 ‘풀’이라 불리는 민어 부레는 단백질 덩어리라 천연 접착제 재료로도 쓰인다. 첫맛은 밍밍하더니 씹을수록 고소하다.

소주를 한 잔 하면서 박 사장은 감회에 잠긴 모습이었다. 올해를 돌아보면 유난히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5~6월엔 가뭄이 극심했고 9월엔 태풍으로 농촌 기반시설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현 정부의 역점 사업인 4대강 사업을 둘러싸고 불거진 정치적 논란에도 마음이 쓰였다고 했다. 농어촌공사는 농업 분야 4대강 사업을 거의 마무리한 상태다. 저지대 농경지에 4대강에서 파낸 흙을 쌓아 침수 피해를 예방하는 ‘농경지 리모델링 사업’은 성과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해마다 농경지에 물이 차서 어려움을 겪었던 광주 서구 용두지구 같은 곳은 올해 태풍이 연이어 닥쳤을 때도 별 걱정 없이 농사를 지었습니다. 저수지 둑을 높여 담수량을 늘렸더니 지난 가뭄 때 다른 저수지보다 12%가량 높은 저수율을 보였고요. ”

○강진군수 시절 가장 기억나

붉은 기가 먹음직스러운 민어회가 상 위에 올랐다. 얇지 않게 썰었는데도 한입에 사르르 녹는다. 기름지고 촉촉한 촉감과 달리 맛은 무척 담백했다. 박 사장이 ‘고향에선 이렇게 먹는다’며 상추 한 쌈에 민어회, 파와 쌈장을 올렸다. 대화는 박 사장이 처음 공직 생활에 발을 들였던 1964년 전남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고등학교 졸업 후 스무 살에 전남도청에서 9급 공무원(서기보)으로 출발했다. 38년 만에 1급까지 올랐으니 지방행정을 아는 사람들에게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힌다. 광양만권 경제특구 지정, 지방행정 구조조정, 농업경영컨설팅제도 최초 도입 등 굵직굵직한 사업들을 해냈다. 하지만 그런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1993년 ‘지방행정의 꽃’이라는 군수로 부임했을 때다.

“4급 서기관 때 강진군수를 맡았는데 별명이 자전거 군수였어요. 자가용을 타면 앞만 보이지만 자전거를 타면 양옆을 다 보게 되니 현안을 챙기기 유리하죠. 구석구석 동네를 다 아니까 공직을 그만두면 집배원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쌀 수매 현장에서 청각장애인 모녀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직원들 대상으로 수화 교육을 했는데 무척 보람을 느꼈죠.”

각별했던 행정 경험은 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 전남도당 위원장을 거쳐 2008년 당 최고위원을 맡았다. 지방 선거 당시 전남도지사 후보로 공천을 받았을 때는 싸늘한 고향 민심을 느끼며 쉽지 않은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중앙 정치 무대에서의 경험은 현재 농어촌공사에서 예산이나 사업을 조율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다.

○새만금 개발에 속도 붙을 것

요즘 그가 고민하는 것 중 하나는 새만금 개발 사업이다. 1991년 농지 조성을 내걸고 시작됐지만 2008년 정부가 새만금을 동북아경제중심지로 조성하기로 하면서 산업, 관광 등 복합 개발사업으로 바뀌었다. 농림수산식품부와 국토해양부, 지식경제부 등 6개 부처에서 개발사업을 나눠 진행하다보니 사업이 지지부진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다행히 최근 국토부가 새만금개발청 설립을 골자로 한 ‘새만금사업 추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공포하면서 사업 추진에 속도가 붙었다.

“새만금 사업이 완료되려면 2020년 이후라야 할 겁니다. 그래도 농어촌공사가 맡은 새만금 농업용지 조성 사업 등은 진척이 빠른 편입니다.”

농업의 위상이 예전같지 않지만 농지의 가치는 여전하다고 그는 역설했다. 기상이변이 잦아진 데다 각국이 식량을 무기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쌀을 제외한 대부분의 곡물을 해외에서 수입하고 있어 식량안보가 머지않아 큰 현안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지금까지는 매년 경지 면적이 줄어들고 있지만 그때쯤엔 새만금 농지가 더없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농어업 분야에서 마음껏 능력 펼칠 청년 늘어나야"

해외 농업 개발에 무게를 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지난 2월 농어촌공사는 해외 농업 개발을 추진하는 민간기업 70여개와 함께 해외농업개발협회를 설립했다. 회원사가 해외에서 생산한 물량을 국내로 들여올 수 있도록 정책을 발굴하고 해외 농업 관련 각종 연구를 진행한다. 지금까지는 해외 농업 개발사업을 벌여도 정작 수확물을 국내에 공급하지 못해 ‘반쪽짜리 식량기지’라는 지적이 많았다.

“한국의 농업도 다른 산업처럼 해외에 진출해 경쟁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개발도상국을 상대로 벌여온 농업기술 전수사업은 그런 면에서 기대가 큽니다.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등에서는 국내 기반사업 노하우에 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굵직굵직한 사업 기회들이 앞으로도 많이 나올 겁니다.”

○젊은 농업 전문가들 나왔으면

계란물을 입힌 민어전은 폭신하고 부드러운 맛에 자꾸만 손이 갔다. 마지막으로 나온 민어탕은 속 푸는 데 제격이었다. 별다른 육수를 쓰지 않고 민어와 무, 파, 마늘, 호박을 넣었을 뿐인데 깊은 맛이 우러났다. 여러 차례 끓여도 뽀얀 국물이 우러난다고 한다.

박 사장이 농어촌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농어촌 가구의 노후는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고령 농업인의 46%가 연금을 받지 못할 정도다. 이들을 위해 2011년 도입한 것이 농지연금 제도다. 농지를 농지은행에 담보로 맡기면 매월 연금을 받을 수 있다. 지난해 1007명의 농업인이 농지연금에 가입한 데 이어 올해는 가입자가 2100명을 넘었다고 했다.

“2년이라는 짧은 시간 시행한 것을 감안하면 농업인의 관심이 높은 거죠. 담보로 맡긴 농지는 계속 경작해서 노후소득을 올릴 수도 있고요. 다만 재산은 아들 딸에게 상속해야 한다는 인식이 여전한 게 장애물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위해 연금 가입에 적극적으로 나서줬으면 좋겠어요.”

젊은층에 대한 그의 기대감은 높다. 최근 신입사원 모집 때는 88명을 뽑는데 5700명이 응시했다. 변호사 3명이 포함됐을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고 했다.

“전문성을 키우는 게 열쇠입니다. 물 관리가 중요한데 대학에 아직 수자원 관리를 전문으로 배우는 과가 없더군요. 그래서 농어촌 고등학생 출신을 뽑아서 한국폴리텍대 물관리전문학교에서 교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젊고 의욕적인 청년들이 이젠 농어업 분야에서 마음껏 뜻을 펼치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박재순 사장의 단골집 유선식당 - 정통 남도식 민어요리로 유명

유선식당은 서울에서 민어 요리로 유명한 곳이다. 목포 출신의 주인 부부가 서초동에서 10년 넘게 정통 남도식 생선 요리를 선보이고 있다. 민어는 매일 아침 목포에서 직송으로 받고 밥은 경기도 이천쌀로 짓는다.

민어찜이나 조림 없이 민어탕과 민어회, 민어전만 한다. 민어의 뼈와 내장, 살, 머리를 넣고 끓인 민어탕은 맛이 개운하다. 민어철이 아닐 때는 병어조림이 이 집의 추천 요리다. 좌석이 많지 않지만 남도 요리를 맛보려는 손님들로 평일마다 가득 찬다.

민어는 ‘백성 민(民)’이라는 이름처럼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생선이다. 하지만 어획량이 줄어들면서 흔하게 먹긴 어려워졌다. 지금은 전남 신안군 임자도 등 일부 어장에서만 잡힌다. 목포엔 유명한 민어 거리가 있는데 유선식당이 민어를 배송받는 곳도 거기다. 민어는 단백질이 풍부해 여름철 보양식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민어탕은 1인분에 2만원(2인 이상), 민어회는 시가로 받는다. 병어조림은 3만(중)~4만원(대). 병어회는 3만5000원. (02)525-6608

김유미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