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과 다른 BOP시장
잘 팔리는 제품서 기능 몇개 빼고 적당한 가격에 내놓으면 실패
냉매 없는 냉장고'초투쿨'
소비자가 감당할 가격 설정…맞춤상품 설계해 인기몰이
고객 니즈·환경 철저히 파악해야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성장에 목마른 기업들에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구매력이 높지는 않지만 막대한 인구가 몰려 있는 곳이다. 선진국 소비자들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다면 이들은 그 바닥에 위치하고 있다는 의미로 ‘BOP(base of pyramid) 시장’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수익성이 있는 시장일까. 간단한 비유를 해보자. 선진국 시장이 백화점이라면 BOP 시장은 할인점이다. 백화점은 부자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고, 할인점은 서민들을 상대로 사업을 한다. 백화점이 성공하기 위해 개별 상품의 마진을 높여야 한다면, 할인점이 돈을 벌기 위해서는 상품회전율을 높여야 한다. 40억명의 잠재적인 소비자가 있는 BOP 역시 마찬가지다. 개별 제품의 이익률은 낮더라도 충분한 시장성을 갖추고 있다.
BOP를 노리는 기업들은 선진국 시장에서 검증된 제품을 싸게 만들면 될 거라는 착각을 한다. 하지만 가난한 소비자들이라고 해서 부자들이 쓰는 제품에서 기능 몇 개를 덜어내고 적당히 가격을 깎아준다고 제품을 구입하지는 않는다. 선진국과는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는 그들의 니즈를 정확히 관찰하고, 그것을 제품에 담아낼 때에만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인도 시장을 타깃으로 하는 냉장고를 기획한다고 해보자. 인도는 무더운 날씨와 습기 때문에 음식이 상하는 경우가 많다. 인도 인구의 80% 이상은 시골에서 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구매력이 없기 때문에 동네 유지들이 소유하고 있는 냉장고를 약간의 이용료를 내고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여럿이 사용하다 보니 음식이 없어져 분쟁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인도인의 냉장고에 대한 갈망은 높은 편이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마이크로 파이낸싱 등 저소득층과 빈곤층의 지출을 유도하는 금융시스템이 확충돼 농촌의 구매력도 증가하고 있다.
반면에 시골 농민들의 상당수는 임시 주택에 살다 보니, 1년에도 몇 번씩 주거지를 옮기는 경우가 많다. 이때 덩치가 큰 냉장고는 상당히 거추장스러운 짐이 된다. 인도인 중 40%는 글을 읽을 줄 모른다. 특히 시골 지역의 문맹률은 더욱 높다. 이들에게 복잡한 매뉴얼과 사용설명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뿐만 아니다. 전력 수급 상황이 아주 열악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정전이 되곤 한다. 게다가 평범한 대중들이 냉장고 구입에 쓸 수 있는 한도는 100달러 미만이란다. 이런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냉장고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야 할까.
고드레지(Godrej)는 2010년 3월 ‘초투쿨(Chotukool)’이란 냉장고를 내놓았다. 이름은 냉장고인데 냉매를 사용하지 않는다. 얼음 뒤로 팬을 돌림으로써 선선한 온도를 유지시키는 정도다. 우리 기준으로는 냉장고라고 부를 수도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이 제품은 출시 첫해 10만개를 팔아치웠고, 덕분에 고드레지는 비즈니스위크로부터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선정되기까지 했다.
‘초투쿨’이 인도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인도 소비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격이다. 출시 당시 초투쿨의 가격은 기존 냉장고의 10분의 1도 안 되는 69달러였다. 고드레지는 먼저 인도 소비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을 설정해놓고 나서, 그 돈으로 만들 수 있는 냉장고를 기획했다. 또 소비자들의 제품 사용환경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들에게 딱 맞는 제품을 만들었다. 전기가 끊어지면 충전기로 팬을 돌릴 수 있게 만들었고, 8㎏이 채 안 되는 무게로 이동성을 높였다.
문득 딸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무렵의 일이 떠오른다. 아빠 생일이라고 선물을 가져온 적이 있다. ‘아직 어린 줄로만 알았는데, 기특하네’ 하는 생각으로 포장지를 뜯은 순간 피식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또래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반짝반짝하는 스티커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빠를 위하는 마음이 대견하길래 기쁜 표정을 지었더니,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아이가 한마디 한다. “아빠도 역시 마음에 들어 할 줄 알았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거든.”
다른 사람들은 자기와는 다른 관점과 선호도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른들만 모여있는 기업들도 가끔 비슷한 실수를 한다. 기업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제품이라면 고객들도 좋아할 거라는 생각, 또는 A나라가 좋아하면 당연히 B나라도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BOP 진출을 고민하고 있는 기업이라면 한 번 더 자문해 봐야 한다. 기존에 잘 팔리는 제품이라서 BOP 시장에서도 당연히 통할 거라고 막연히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해당 나라의 소비자 특성을 얼마나 면밀히 알고 있는지 말이다.
이우창 <세계경영연구원(IGM)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