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에 쫓겨 미국갔지만…이젠 국무부 전산망 책임지는 '1억 달러 사나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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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이 만난 사람 - 이덕선 美 얼라이드테크놀로지 회장
봉사활동으로 입양시키는 일 하다 미국행 결심
"인간관계가 최고의 투자"
봉사활동으로 입양시키는 일 하다 미국행 결심
"인간관계가 최고의 투자"
1939년 황해도 연백에서 독실한 천주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6·25전쟁 1·4후퇴 때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피난을 와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전쟁 중 학도병으로 군 복무를 마치고 한국외국어대에 복학했지만 돈이 없어 학교를 중도 포기했다.
가난에 찌들린 26세 청년은 도전에 나섰다. 6남매 중 장남이지만 가족을 두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갔다. 이덕선 미국 ‘얼라이드테크놀로지(Allied Technology)’ 회장의 46년 전 이야기다.
이 회장은 미국 이민 1세대 가운데 성공한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그가 이끌고 있는 얼라이드테크놀로지는 미국 북동부 지역에서 인정받는 컴퓨터 네크워크 시스템 보안 전문업체다. 국무부, 국방부 산하 정보국(DIA), 교통부, 해안경비대 등에 관련 프로그램을 공급하고 있다. 직원 600여명에 워싱턴DC, 메릴랜드,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텍사스 등에 거점을 두고 연매출 1억달러를 올리고 있다. 이 회장을 메릴랜드주에 있는 록빌 본사 사무실에서 만났다.
▷무슨 용기로 미국행을 ‘감행’했나.
“가난에서 벗어나 성공해보자는 일념으로 미국행을 택했다.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미국은 꿈과 희망이었다. 어떻게, 언제 가느냐가 문제였지 모두가 미국을 생각했고 동경했다. 나는 그때 돈이 없어 일본 요코하마까지 비행기로 날아간 뒤 거기서 로스앤젤레스(LA)까지는 구호물자를 실어나르던 빈 화물선을 2주 동안 타고 왔다.”
▷LA로 오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태평양을 건너올 때 태풍을 만났다. 사흘 연속 배가 뒤집힐 정도로 파도가 쳤다. 미국 땅을 밟기도 전에 죽는 줄 알았다. 사흘이 지나자 언제 태풍이 몰아닥쳤는지 모르게 바다가 평온해졌다. 다시 기운이 나고 힘이 솟았다. 인생역전을 할 수 있다는 직감이었다. 낯선 미국 생활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영어를 제법 잘했다. 집안 친척 어른인 장면 전 총리의 둘째 아들, 나한테는 숙부뻘인데 그 분이 워싱턴DC에 살고 계셨다. 그래서 워싱턴행을 결심했다.”
이 회장은 외대 독어과를 다닐 때 가톨릭구제회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그때 한국 고아들을 미국에 입양시키는 일을 맡았다. 그가 입양시킨 아이들만 200명. 미국행을 결심한 인연이 되기도 했다.
▷전공과 다른 컴퓨터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된 배경은.
“미국에 도착한 후 한 클럽의 안내데스크에서 시간제 일을 얻었다. 1주일에 70달러씩 버는 게 고작이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당시 컴퓨터 계통에서 일하던 숙모님이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워보라고 권했다. 컴퓨터가 막 상용화될 무렵이었다. 컴퓨터학원에 등록한 뒤 졸업해 그 학원을 만든 회사인 ‘컨트롤 데이터 코퍼레이션’에 취직했다. 마침내 희망 있는 일자리를 구한 것이다. 당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국의 직장 생활이 순탄하지 않았을 텐데.
“컨트롤 데이터 코퍼레이션에서 2년 정도 일한 뒤 통계자료를 분석하고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웨스탯(Westat)이란 회사로 옮겼다. 처음 몇 년 동안 밤낮 없이 일에 매달렸다. 회사에서 신뢰를 받아 7년 만에 프로그래밍을 총괄하는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그로부터 13년간 더 근무했다.”
▷엘리트 코스를 밟다가 창업한 계기는.
“웨스탯은 내게 일종의 비즈니스 스쿨이었다. 인사관리를 비롯해 경영의 많은 것을 배운 시기였다. 비즈니스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1986년에 지금의 얼라이드테크놀로지를 창업했다. 무작정 뛰어든 게 아니었다. 20여년간 현장에서 경험을 쌓고 도전한 것이다.”
이 회장은 1986년 창업 후 몇 년 동안 고전하다가 1992년 기회를 잡았다. 소수인종이 운영하는 기업을 배려하는 연방정부의 ‘8A’ 프로그램이 기회의 창이었다. 첫 일감은 미국국립보건원(NIH)에서 따냈다. 미국 중소기업청이 지원하는 8A 프로그램은 연방정부의 조달 물량 일부를 소수인종이 운영하는 기업에 배분하는 것이다. 이 회장은 NIH 프로젝트 설명회 때 회사 내 전문가 10명을 모두 데리고 갔다. 프로젝트를 수행할 전문가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는데 적중했다.
▷소수인종 출신으로 연방정부에 납품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웨스탯에 근무하면서 쌓아온 경력과 인맥이 가장 큰 밑천이었다. 웨스탯의 고객들이 내가 회사를 차린 후 큰 도움을 줬다. 그들에게 신뢰를 얻었고, 다양한 비즈니스 네트워크가 큰 자산이 됐다고 생각한다.”
▷미국도 인맥 관리가 중요하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우선 실력이 기본이고 그 다음으로 인간관계가 뒷받침돼야 한다. 일을 따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따온 일을 잘해 신뢰를 쌓는 게 더 중요하다. 일을 잘하면 신뢰가 쌓이고 일감을 더 많이 받게 마련이다. 좋은 관계는 새끼를 치고 자꾸 늘어나게 된다. 때론 회사의 운명을 좌우하는 계약들도 대인관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경영철학이 있다면.
“비즈니스의 기본은 대인관계라고 본다. 모든 것이 대인관계에서 시작되고 대인관계로 끝이 난다. 별다른 경영 묘법이 있다는 게 아니다. 원만한 대인관계를 만들어가는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현장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은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공평하게 대해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어떤 관계가 가장 중요한가.
“하청업체와의 관계, 고객과의 관계 등 중요하지 않은 관계가 없다. 그중에서도 직원들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경영자는 항상 직원들이 행복해 하며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회사에서 피치 못해 직원을 해고할 때는 직원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해고된 직원이라도 나중에 나를 도와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미국 이민이나 창업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한다면.
“세상에 공짜는 없다. 하루아침에 일확천금을 벌 수 있는 비즈니스도 없다. 큰 욕심내지 말고 한번 시작한 일을 전력을 다해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나는 미국 땅을 밟고 6년 동안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했다. 당시 6년은 내 인생의 귀중한 ‘투자 기간’이었다. 누구나 투자 기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처음에 만들어진 평판이 계속 인생을 따라다니는 만큼 사업 초기부터 평판 관리를 잘해야 한다.”
◆ 이덕선 회장은?
"돈 없어 대학중퇴 더이상 없길"…국내 대학에 430만달러 기부
가톨릭대는 지난해 10월15일 경기 부천 성심캠퍼스에서 ‘제1회 버나드 원길 리 국제포럼’을 열었다. 1900년대 초 황해도 연백에서 과수원을 운영하며 신앙을 전파하고 마을에 강당을 지어 문맹퇴치에 앞장선 고 이원길 씨를 추모하기 위한 행사였다. 선각자 이원길 씨가 바로 이덕선 얼라이드테크놀로지 회장의 부친이다.
장남인 이 회장과 막내 이덕형 글로텍 회장은 2년 전 가톨릭대에 300만달러를 기부했다.
이 회장은 모교인 한국외국어대에도 총 130만달러를 기부했다. 이 중 100만달러는 장학기금으로 운용된다. 매년 6명이 전액 장학금 혜택을 받는다. “저처럼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끝내지 못하는 학생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기부할 생각입니다.”
이 회장은 한국외대 독어과를 다녔지만 가정형편 탓에 졸업을 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민 1세대로 성공한 그의 삶이 고국에까지 전해지자 한국외대는 1999년 이 회장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이 회장은 미국 워싱턴DC 근교에서도 ‘기부 천사’로 통한다. 조지타운대, 천주교 워싱턴대교구 등에 정기적으로 기부하고 있다. 여러 한인단체들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다. 300만달러를 기부해 워싱턴 근교에 노인요양시설을 짓기도 했다.
기부철학을 묻자 “주는 사람의 기쁨이 받는 사람의 기쁨보다 더 크다”며 “남을 도와주는 사람 가운데 못살게 되거나 망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라는 비즈니스맨 다운 답이 돌아왔다. “한 번 베풀면 다음에 더 크게 베풀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한마디로 ‘Giving is good business’죠.”
워싱턴=장진모 특파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