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명품 열광' 요즘세태 씁쓸
김다은 < 소설가·추계예술대 교수 daeun@chugye.ac.kr >
현대 여성들의 명품백처럼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이 다이아몬드 반지다. 일본은 조선을 소비시장으로 삼기 위해 고도의 상술을 발휘했고, 조선 여성들은 이에 곧이곧대로 넘어가 열광했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다이아몬드 반지는 매일신보 광고에 여성 머리보다 더 큰 형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나중에 조선일보가 모던 걸들(Modern girls)의 손가락에 빠짐없이 끼워져 있던 다이아몬드 반지에 대한 풍자만화 컷을 실을 정도로 열풍은 대단했다. 당대 영화나 연극으로 인기를 누렸던 ‘장한몽’에서 심순애를 김중배에게 빼앗긴 이수일의 절규도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렇게 좋더냐!’
한데 우리나라 고유의 손가락 장식물은 반지가 아니라 ‘가락지’였다. 가락지는 두 개의 둥근 고리로 만들어져 쌍가락지라고도 불렀는데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다. 음양의 조화라거나 헤어질 때 증표로 나누어 가지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가락지라는 명칭이 반지로 바뀐 것도 일본이 조선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팔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다이아몬드 반지는 쌍으로 낄 수 없는 탓에, 둘에서 하나가 되거나 나눈다는 뜻에서 반지(半指)혹은 반지(斑指)가 되었다.
그런데 미국인 저널리스트 프랭크 카펜터가 ‘드모리스트 패밀리 매거진’ 1894년 11월호에 명성황후 특집을 실으면서 명성황후의 “길고 가는 손은 모양이 예쁜데 다이아몬드로 빛난 적이 없다. 유일하게 끼는 것이 금가락지인데 항상 손가락 하나에 쌍으로 끼었다’라고 적고 있다. 명성황후의 주치의였던 여의사 릴리아스도 황후가 유럽 장신구와 다이아몬드 반지 등을 많이 가지고 있을 법 한데도 별로 한 적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여성들의 부와 유행의 상징이었던 다이아몬드 반지 대신에 명성황후는 금가락지에 애착을 보였다. 외국인들의 눈에는 그런 조선 황후가 매우 개성있고 자존심 강한 모습으로 비쳤던 것 같다.
그렇다면 왜 황후는 금가락지를 고집했을까. 다이아몬드가 일본을 상징했다면 금은 조선을 상징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금(金)이 많이 나는 나라로 유명했다. 가야 앞에 ‘금관’을 붙여 금관가야라 하고, 신라시대부터 김(金·금)씨가 왕이나 지배계급으로 황금문화를 이어갔다. 고려시대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든 것도 우연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기와지붕에 금박을 넣었다고 농을 할 정도로 생활 전반이 금으로 세공된 민족이었다. 우리나라는 금이 많이 나고 금을 사랑하던 나라였다. 그런데 일본은 조선의 금을 탈취해가면서도 금은 촌스럽고 다이아몬드는 최고라는 인식을 암암리에 심었다.
명성황후는 당시 서구문물을 동경하고 외국인들과의 교류를 즐겼던 황실 권력가였다. 보석류는 얼마든지 수중에 넣을 수 있었지만, 그는 조선을 상업적으로 점령한 다이아몬드 반지보다 금가락지를 택했다. 위태로운 국가 상황에서 금가락지가 황후의 자존심과 긍지를 더 잘 나타낸다고 믿었던 것 같다. 항간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피신하는 과정에 몸에 유일하게 지니고 있던 금가락지를 사공에게 내어주고 강을 건넜다 한다.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마음이 불편한 것은 과거의 역사 때문만은 아니다. 과거 일본인의 상술과 요즘 외국인들의 공격적인 상술이 별반 다르지 않고, 과거 다이아몬드처럼 요즘 여성들의 명품백이나 구두에 혹하는 모습이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명성황후의 금가락지가 현대 여성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다은 < 소설가 · 추계예술대 교수 daeun@chugye.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