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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덕희 경동제약 회장, 주사제 직접 맞으며 임상 테스트…외국제약사와 소송 '10승 무패' 신화

[기업&기업人 - 파워기업인 생생토크]

"수입 약품 국산화해 싸게 공급" 외길 37년
까다로운 日시장 뚫고 약품원료 수출
1980년대 중반 독일 프랑크푸르트공항. 40대 후반의 한국 중소기업인이 비행기 트랩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독일에 가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 괜히 비싼 비행기삯만 날리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귓전에 맴도는 상태에서다. 중간에 수입을 대행해주는 오퍼상들도 가봐야 별 수 없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그 기업인은 전차와 택시를 갈아타고 한 제약 원료업체에 도착했다. 독일 기업을 찾아간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약품 원료를 좀 파십시오.”

듣도 보도 못한 한국 중소기업인의 저돌적인 요구에 독일 기업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 원료는 기존 거래처 외에는 팔지 않습니다.” 한국 기업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한국에선 완제품 약을 수입해 파는데 너무 비쌉니다. 제가 국산화해서 싸게 공급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원료를 구하러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밀고 당기는 상담은 반나절 이상 걸렸다. 그러는 동안 이 기업인은 한국 제약시장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며 끈질기게 설득했다. “우리가 제품화하면 당신 회사의 매출도 늘어날 것이고 그러면 둘 다 윈윈하는 게 아니냐”고. 결국 독일 기업인은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한국 기업인의 집념과 박식한 시장 분석에 혀를 내둘렀다.

그로 부터 10여년 뒤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한 제약업체. 이곳에서도 앞에 사례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는 한국의 대기업들과 수입경쟁을 벌였는데 이스라엘 업체 사장은 한국의 대기업 대신 이 기업인에게 한국 내 판매권을 주기로 결정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제약시장에 대한 이해없이 좋은 조건만을 제시했지만 당신은 정확한 시장 분석을 바탕으로 설득력있게 제안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중소기업인이 류덕희 경동제약 회장(75)이다. 그는 도전적인 기업인이다. 힘들더라고 남들이 꺼리는 분야에 도전해 하나씩 성취하고 있다. 우선 전문의약품의 수입대체다. 성균관대 화학과(56학번)를 나온 류 회장은 재학 중 한 해 휴학하며 학비를 벌기 위해 모 전기업체에서 일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은 형광등을 주로 일본에서 수입해 썼는데 국내 전압이 불안정해 형광등이 제대로 안 켜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안정기를 분해한 뒤 한국 실정에 맞게 개발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열악한 제조업에 눈을 뜨게 됐다”고 류 회장은 말했다.

◆임상시험 위해 수십회 주사 맞기도

대학졸업 후 친구와 공동으로 소규모 제약업체를 운영한 뒤 1975년 광화문에서 창업(당시 사명은 유일상사)했다. 몇 달 뒤 사명을 경동(京東)제약으로 바꿨다. ‘서울의 동쪽’은 ‘해가 뜨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수입약품의 국산화였다. 이를 통해 소비자에게 저렴하게 공급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어찌보면 무모하고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대부분 약품은 골리앗 같은 다국적기업들이 특허라는 막강한 무기를 내세워 제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내 간판급 제약업체들조차 다국적기업과 합작이나 기술제휴를 통해 약품을 생산하던 때였다.

희한한 것은 그가 창업한다고 하자 그전에 함께 근무했던 후배들이 줄지어 합류한 것이다. 자칫 초반에 무너질 수도 있는 신생 업체에 입사한 것은 류 회장의 비전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회사가 안정될 때까지 월급을 안 받아도 좋다”고 스스로 단서를 달았다. 이들과 함께 연질캡슐, 주사제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주사제의 경우 류 회장 스스로 수십 차례 주사를 맞으며 임상시험 대상이 됐다.

수입대체를 위한 원료 확보에도 적극 나섰다. 우선 선진국 제약업체를 찾아다니며 원료를 구했고 그 뒤엔 직접 지구 반바퀴를 돌아 남미까지 찾아다녔다. 그는 ‘퍼스트 제너릭(First Generic)’ 제품을 국내에서 속속 출시했다. 원료 특허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제조방법을 달리해 원료를 개발한 뒤 약품을 내놓은 것이다. 상당수 제약업체들이 다국적기업과의 분쟁을 우려해 도전하길 꺼리는 분야다.

하지만 류 회장은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 좋은 결실을 냈다. 이를 계기로 다국적기 들로부터 10여 차례 소송을 당했으나 모두 이겨냈다. 60여명으로 이뤄진 중앙연구소의 학술개발팀 합성연구팀과 사내 특허 관련 담당자 등과 충분히 대비한 데 따른 것이다.

류 회장은 “일부 다국적기업은 우리가 개발한 제품의 특허를 양도해 달라며 수십억원의 로열티를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이를 거절하자 곧바로 제소해왔다”고 회고했다. 당근과 채찍을 동원한 것이다. 하지만 이 소송에서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웠고 승소했다.

이런 노력을 통해 경동제약은 90여종에 이르는 전문의약품 등을 개발, 생산하고 있다. 류 회장은 “전체 매출의 95%가량이 전문의약품”이라고 설명했다. 개량신약도 2종을 내놨다. 비만치료제 ‘실루민 캡슐’과 항혈전제 ‘인히플라 정’이 바로 그것이다.

◆가장 까다롭다는 일본에 원료 수출

류 회장은 이제 수출에 적극 나서고 있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까다롭다는 일본에 원료를 내보내고 있다. 그는 “일본은 미국, 유럽보다 진출하기 어려운 시장”이라며 “이곳에서 통하면 전 세계에서 통한다는 생각으로 일본 시장을 뚫고 있다”고 말했다. 대상은 순환기계용과 소화성궤양용 원료 등이다. 경동제약은 작년 하반기부터 올 상반기까지 최근 1년간 수출액이 약 1000만달러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회사의 특허는 국내 26건, 해외 19건 등 45건(출원 5건 별도)에 이른다. “우리 회사의 작년 매출은 1275억원으로 전체 200여개 제약업체 중 20위권이지만 특허는 비슷한 규모의 업체에 비해 월등히 많다”고 류 회장은 설명했다. 그동안 수입대체와 국산화를 위한 연구ㆍ개발(R&D)에 힘을 쏟은 결과다. 이 회사의 R&D 인력은 전체 직원 460여명의 10%가 넘는다.

류 회장의 꿈은 ‘인류의 건강과 행복의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의 영세명인 ‘모세’처럼 경동제약을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향해 한발자국씩 나아가고 있다.

"연기가 나지 않는 집에 쌀·보리 등 주고 오라"던 할머니에게 '인간존중' 배워

류덕희 회장의 고향은 경기도 화성이다. 공장이 있는 곳 바로 부근이다. 이곳에는 윗동네와 아랫동네가 있는데 어릴 적 그의 할머니는 저녁무렵이 되면 늘상 “윗 마루턱 은행나무 밑에 가서 동네를 살펴보고 오라”고 했다고 한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집은 저녁을 굶는 집이다. 당시 대부분의 시골집은 장작을 때서 가마솥에 밥을 지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어린 덕희에게 “연기가 나지 않는 집에 쌀과 보리를 갖다 주고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류 회장의 인생철학이자 경영철학은 ‘인간존중’이다. 그가 장학재단 설립이나 주식 기부를 통해 어려운 사람이나 종업원을 배려하는 것은 가톨릭 정신과 더불어 어릴 적 할머니의 가르침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는 2001년 사재 30억원을 출연해 ‘경동송천재단’을 만들었다. 장학재단이다. 지금은 후원자와 경동제약의 기부에 힘입어 기본재산이 87억7000만원으로 불어났다. 지난 10년간 이 재단을 통해 장학금을 받은 중·고·대학생은 누적인원으로 1286명에 이른다.

이에 앞서 1997년에는 사내근로복지기금을 설립, 임직원 자녀의 학자금은 물론 체육·문화활동비, 경조비, 생활안정자금 등을 지원해 오고 있다. 류 회장은 지난 2월 이 기금에 주식 20만주(당시 시가 25억2000만원)를 추가로 내놨다. 이 기금은 경동제약 주식 40만주와 현금 6억2000만원을 보유 중이다.

그는 회사 재직 중 몸을 던져 일하다 타계한 임원의 유가족을 위해 그 부인에게 과장 직급을 부여한 뒤 순차적으로 임원 직급까지 승진시키며 보살폈고 유자녀를 우선 입사시키기도 했다.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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