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거와 관련된 통합진보당의 행태는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정당의 운영을 맡은 ‘당권파’는 총선거 후보 선출 과정에서 온갖 부정들을 저질러 자기 사람들을 후보로 내세웠다. 그런 부정이 드러나도,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버틴다. 우리 정치 역사에 없었던 행태다.

자연히, 그런 행태의 원인에 대한 설명들이 여럿 나왔다. 파벌의 이익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얘기, 이미 얻은 이권들이 크고 그 이권들을 누리는 ‘생계형 주사파’가 커졌다는 얘기, 군부 정권이라는 괴물과 싸우는 과정에서 그들이 괴물로 되었다는 얘기,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기 때문이라는 얘기 따위다. 이런 얘기들이 그른 것은 아니지만, 설명이라 하기엔 너무 부족하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정치에선 그 점이 특히 두드러지지만, 통합진보당 사람들처럼 행동한 정치세력은 없었다. 악(惡)을 오래 들여다보면 악을 품게 된다는 니체의 얘기는 일리가 있지만, 그것은 “군부 정권과 맞섰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왜 그들만 그런 행태를 보이는가”라는 물음을 만난다.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이내 “왜 그들만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는가”라는 물음을 불러온다.

자신의 이념적 성향에 맞지 않는 사실들을 애써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그들이 ‘종북주의자’들이라는 사실에서 답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들의 핵심적 지도자들은 거의 다 북한 정권을 위해 암약하다가 검거돼 재판을 받고 복역했다. 지금도 그들이 쓰는 언어와 행태는 북한 정권의 영향을 깊게 받고 북한 정권의 행태를 본받는다는 것을 섬뜩하도록 뚜렷이 보여준다. 투표할 때 당원증을 들어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그 점을 상징한다.

그래서 이번 사태를 정직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그들이 따르는 이념의 특질에서 그들이 보인 행태의 원인을 찾게 된다. 실제로 사람의 행태를 결정하는 요인들 가운데 이념은 가장 근본적 수준에서 가장 크게 작용하므로, 그것에 대한 고려 없는 설명은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따르는 이념은 물론 북한 정권의 이념이다. 북한 정권이 추종해온 이념은 전체주의의 틀을 벗어난 적이 없다. 전체주의는 지도자가 결정한 단일 목표에 사회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이념이다. 그래서 지도자의 결정이 궁극적 권위를 지니고 다른 것들은, 심지어 도덕이나 법조차, 지도자의 수시로 바뀌는 결정에 종속된다.

이 점에서 자유주의와 전체주의가 근본적으로 갈린다. 자유주의 사회에선 선과 악을 판별하는 객관적 기준이 존재한다. 특수한 상황에서 더 큰 악을 막기 위해서 작은 악을 고르는 마키아벨리안 정치 지도자도 자신이 고른 정책이 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전체주의 사회에선 그런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지도자가 제시한 목표의 달성에 이바지하는 행위들은 바로 그 사실 덕분에 선이고 방해하는 행위들은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악이다.

자연히, 전체주의 사회에선 절차적 안정성이 없다. 어제의 정설(定說)이 오늘의 이설(異說)이 되고,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역적이 된다.

이번에 통합진보당의 종북주의자들이 보인 행태는 그들이 따르는 이념으로 평가하면 옳고 합리적이다. 그들이 맺었다는 ‘군자산의 약속’에 나온 목표를 위해서 후보 경선을 부정하게 실시한 것은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선이다. 절차는 원래 무시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절차적 문제를 들어 그들을 공격하는 사람은 그들의 눈엔 이념적으로 무지한 자들인 것이다.

많은 시민들은 그런 종북주의자들이 국회의원이 되는 것을 걱정한다. 물론 그런 사태도 걱정스럽지만, 정말로 큰 걱정은 전체주의가 우리 사회에 흔히 인식되는 것보다 널리 퍼졌다는 사실이다. 전체주의가 종북주의자들로 밝혀진 사람들에게 국한됐을 리 없다. 20세기 말엽에 ‘주사파’라는 말이 유행했다는 사실이 가리키듯, 한때는 우리 사회를 전체주의가 덮었었고 지금도 목적이 모든 수단들을 정당화한다는 생각을 품은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전체주의에 오염된 풍토를 정화하는 일은 종북주의자 몇 명이 국회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고 훨씬 어렵다.

복거일 < 소설가·객원논설위원 eunjo35@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