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스스로 붕괴하고 있다는 ‘일본 자살론’이 요즘 그들 지식인 사회를 흔들고 있는 것은 인상적이다. 병리구조의 온갖 쓰레기가 쌓이고 수십년 동안 단단하게 다져진 ‘퇴적(堆積)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리더십이 실종된 일본이 망하는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변화의 에너지를 상실한 채 가라앉고 있다는 자각과 함께 심각한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센고쿠(仙谷由人) 전 관방장관은 일본의 54기 원자력발전소가 다음달 초 모두 가동 중단되는 상황을 ‘집단자살’로까지 말했다.

자살론 신드롬은 올해 초 아사히(朝日)신문에 실린 ‘내일의 사회에 책임을 갖자-일본의 자살을 걱정한다’는 논설로 촉발됐다. 글을 쓴 와카미야(若宮啓文) 주필은 오래 전인 1975년 시사월간지 문예춘추(文藝春秋)에 실린 논문 ‘일본의 자살’을 인용, 고대 그리스나 로마가 스스로 번영에 취해 내부로부터 붕괴되었듯, 일본 또한 중우(衆愚)정치로 자살이 현실화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문춘은 지난 3월호에 37년 전의 논문을 그대로 다시 게재했다. 당시 ‘그룹1984’라는 익명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글이다. 일본이 거침없는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시점에 위기의 경종을 울린 글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모든 문명은 바깥으로부터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사회의 붕괴로 파멸했다는 것을 명제로, 로마제국의 멸망에서 일본의 몰락을 예감한다는 내용이다.

다름아닌 ‘빵과 서커스론’이었다. 로마가 잇따른 정복으로 거대한 부를 모으고 시민들은 공짜로 빵을 얻게 되면서 노동을 망각하고 낭비와 오락에 빠졌다. 정치가들은 시민의 환심을 얻기 위해 빵과 서커스 더주기 경쟁을 벌였고,시민들은 번영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부터 복지코스트의 증대, 빗나간 평등주의, 사회활력 상실, 포퓰리즘의 범람으로 몰락이 시작됐고, 일본도 이런 자살메커니즘에 들어가고 있다는 논지였다.

문춘은 이번에는 5월호 특집으로 ‘신(新)·일본의 자살’이란 가상소설을 실었다. ‘그리스처럼 되는 날’이란 부제를 달고 지금 일본의 정치·경제·사회적 상황이 국가파탄을 불러오는 과정을 그렸다. 노다(野田佳彦) 정권이 소비세 인상에 실패하면서 와해되고, 젊은 오사카시장 하시모토(橋下徹)가 이끄는 내각이 새로 출범하지만 1000조엔을 넘어 국내총생산(GDP)의 200%를 웃도는 누적재정적자 개선능력의 상실과 채무상환 위기로 신용등급은 떨어지고 국채값 폭락의 방아쇠가 당겨진다. 연금 40% 삭감, 공무원 50% 감축 등의 비상조치를 내놓지만 분노한 시민들의 소요가 잇따르고 경제와 민생은 악성 인플레로 궁핍의 늪에 빠지게 된다는 시나리오다.

이 같은 자살론은 결국 일본 정치의 무능에 대한 경고가 그 핵심이다. ‘유통기한 1년’이라는 총리의 빈번한 교체로 인한 무신념·무책임 정치, 불안한 리더십은 자기결정능력을 상실한 채 포퓰리즘 남발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이는 불임(不妊)정치를 구조화함으로써 빠르게 국가자살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2009년 민주당은 개혁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50여년을 장기집권하면서 ‘거대한 포퓰리즘 덩어리’로 불렸던 자민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민주당 또한 마약과 다름없는 무상복지 퍼주기 공약시리즈를 내세워 집권하기는 마찬가지였다.그 취약한 리더십의 문제들은 지난해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남김없이 노출됐다. 국가적 위기에 정부 수뇌부와 관료들은 허둥대기만 하고, ‘예상 밖’이란 말로 책임을 피해가면서 거듭된 거짓말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만 했다.

무책임 정치에 골병드는 것이 어찌 일본뿐일까. 무상복지를 앞세운 우리 정치권의 포퓰리즘 경쟁은 또 어떻고…. 늘 일본을 따라잡고 극복하려 노력했던 우리로서 일본이 직면한 위기는 결코 남의 일 같지 않다. 문제는 일본이 치고 올라갔던 번영의 정점에 이르려면 우리가 갈길은 아직도 아득한데, 우리 사회는 벌써 일본을 추락으로 몰고가는 병리적 현상에 멍들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위기를 제때 자각한다면 그래도 희망의 여지가 있다. ‘일본 자살론’이 위기탈출을 위한 몸부림의 의미로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추창근 기획심의실장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