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언어들은 기체사회를 더욱 기화(氣化)시킨다. 이른바 누리꾼들은 집단심리에 매몰돼 사실 관계도 없이 즉물적이며 자극적인 언어를 마구 내뱉는다. 개방 아닌 폐쇄성, 연대 아닌 집단성을 강화하는 것이 뒤집힌 SNS다. 윤석민 서울대 교수의 지적대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즉각 내뱉어야 하는” 그런 1차원적 사회다. 최근 ‘채선당 임산부’ ‘국물녀’ 사건에 이어 일명 ‘슈퍼 폭행녀’ 사건 등이 모두 중세 마녀사냥식으로 내달리고 있다. 주류 언론이 여기에 편승해 이를 부추기는 데 한몫한다는 게 더욱 기가막힌 일이다.
정치권은 이런 퇴영적 사회구조를 만들어 내는 공장역할을 하고 있다. 정치는 사회공동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라는 말은 이미 전설이 됐다. 정치가 저질화를 부추긴다. 억지를 부리면 그것도 말이 된다는 식이다. 그렇게 언어의 의미조차 달라진다. 지금 감옥에 있어야 할 서울시 교육감은 전교조 교사를 특채하면서 “이런 분이 담임인 학생은 얼마나 행복할까 싶었다”라고 未� 멋대로 세계를 규정한다. 이른바 시민단체 원로라는 사람들은 내부의 갈등 문제를 길거리 투쟁으로 해결하려 한다. ‘가카 빅엿’이라는 막말로 법관의 품위를 팽개친 판사를 오로지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는 이유로 국회의원 출마자로 영입하려는 정당이 있을 정도다. 영혼이 마비된 채 거리의 노예, 대중의 놀이개로 전락한 루쉰의 ‘아큐’들이다.
자신이 어디에 실존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과 분노 공포만이 한국인의 텅빈 영혼을 채운다. 입소스가 최근 조사한 결과 한국의 행복지수가 세계 꼴찌권을 맴돈다고 한다. 러시아나 프랑스등 올해 대선을 치르는 다른 나라는 이런 정도는 아니다. 모두가 국가 경쟁력을 어떻게 하면 끌어올릴지를 놓고 치열하게 토론한다. 한국은 이렇게 아큐의 국가로 흘러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