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의 선율] 비너스와 시인 '달콤한 사랑'…파스텔톤 · 흐릿한 형태로 몽환적 동경의 세계 그려
화가 치고 음악에 심취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화가는 음악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마음의 붓을 들고 음악가 역시 그림을 보면서 가슴으로 음표를 써내려 간다. 그것을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이른바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서구문화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미술과 음악은 모두 수학이라는 공통의 샘물에서 흘러나왔다. 음악과 미술을 함께 좋아하는 것은 적어도 서구인들에겐 자연스러운 일이다.

앙리 팡텡-라투르(1836~1904)라는 19세기 프랑스 화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역시 음악을 들으면 붓을 들지 않고는 못배기는 음악 마니아였다. 그는 사실적인 초상화와 정물화로 한 시대를 풍미한 보수적 화풍의 화가였지만 정신적으로는 반전통, 반인습의 기치에 공감하는 낭만적 기질의 소유자였다. 오랫동안 마네를 중심으로 한 인상주의자 그룹의 열렬한 추종자였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낭만적 기질의 그가 낭만주의 음악에 심취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그는 슈만을 비롯한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광팬’이었다. 그중에서도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팡텡-라투르는 단순히 바그너 음악에 열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오페라 주요 장면들을 틈만 나면 화폭에 옮기곤 했다. 그는 왜 그토록 바그너의 오페라에 열광한 것일까. 그것은 바그너의 오페라에 담긴 낭만 정신과 기성 오페라의 전통을 쇄신한 악극(樂劇)이라는 새로운 음악적 형식의 창안과 관련이 있다.

팡텡-라투르가 살았던 19세기의 오페라는 변혁의 기로에 서 있었다. 성악이 중심이던 당대의 ‘오페라 부파’는 산업혁명, 시민혁명 이후 새롭게 등장한 신흥 부르주아 계층의 욕구를 만족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사회적, 경제적 지위의 상승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뭔가 채울 수 없는 정신적 헛헛함이 있었다. 그것은 예술사가 아놀드 하우저가 지적한 대로 자신들이 과거의 귀족 못지않은 물질적 풍요와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결코 귀족 같은 스케일이 큰 삶을 살 수는 없다는 현실적 자각에서 오는 좌절감과 그로부터 비롯된 과잉 보상 욕구였다. 그 실현 불가능한 꿈은 오로지 예술이라는 가상의 세계, 낭만의 세계 속에서만 채워질 수 있는 것이었다.

자코모 마이어베어(1791~1864)가 완성한 ‘그랜드 오페라’는 그런 부르주아 계층의 장엄한 삶에 대한 갈증을 충족시키기 위한 시도 중 하나였다. 독일인으로서 프랑스에서 활동한 그는 호화롭고 장대한 스케일의 무대 위에 합창, 발레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종의 종합예술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마이어베어의 오페라는 지나치게 관객의 욕구를 의식한 나머지 과장되고 허식적이어서 극적 완결성이 떨어지고 음악적 깊이에서도 문제점을 드러냈다. 뒤를 이은 바그너 악극은 마이어베어의 영향 아래 숙성된 것이지만 극적 요소를 보다 강화함으로써 시와 음악, 연극이 결합한 진정한 의미의 종합예술을 이뤄냈다.

바그너 자신이 직접 리브레토를 쓴 ‘탄호이저’는 그런 악극의 대표적 작품 중 하나로 독일 오페라의 신화적 요소와 프랑스 오페라의 중세 취미를 결합한 것으로 감각적 사랑에 대한 정신적 사랑의 승리를 그린 것이다. 중세 바르트부르크 영주의 음유시인인 탄호이저라는 인물이 신화적 존재인 비너스와 감각적 사랑에 빠지는 등 쾌락을 찬미하다 그를 연모했던 영주의 조카 엘리자베트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줄거리다. 바그너는 탄탄한 리브레토를 바탕으로 마이어베어의 오페라가 지닌 연극적 결함을 보완하고 여기에 금관악기를 전면에 내세운 새로운 악기 편성을 통해 오페라의 신기원을 연다.

새 시대의 갈망을 담을 새로운 예술 형식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던 팡텡-라투르에게 바그너의 새로운 오페라는 그의 갈증을 채우고도 남았다. 특히 정신적 사랑을 중시하는 인습에 반기를 든 주인공은 곧 낭만주의 예술가의 자화상이기도 했던 만큼 그의 공감은 더욱 큰 것이었다. 그는 바그너의 초상은 물론 ‘탄호이저’를 비롯한 오페라의 주요 장면들을 화폭에 담아 자신의 갈망을 표출했다.

1864년 그린 ‘베누스베르크의 탄호이저’는 주인공이 사랑의 여신인 비너스의 유혹에 빠져 달콤하게 사랑을 나누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왼편 아래 하프 위에 손을 올려 놓은 채 앉아 있는 탄호이저의 무릎 위로 반라의 비너스가 농염한 자태로 몸을 기대고 있어 둘이 육체적 사랑 관계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 오른편으로 한 님프가 쌍나발을 불고 있고 다시 그 오른쪽에는 세 님프가 탬버린을 들고 원무를 추고 있다. 원무는 시간의 흐름을 뜻하는 것으로 육체적 사랑의 덧없음을 상징한다. 오른쪽 전경에는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어 이곳이 현실과는 단절된 신화적 존재의 주재지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묘사 테크닉에 있다. 기법적으로는 철저한 사실주의자였던 팡텡-라투르가 놀랍게도 자신의 기법을 내던지고 낭만주의적 화법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근법은 불분명해지고 명암법도 희미한 자취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대신 커다란 모노톤의 색면들이 군데군데 자리를 메워 평면성이 두드러진다. 색채도 감성적이다. 파스텔 톤의 녹색, 청색, 붉은 색이 서로 보색관계로 얽히면서 묘사돼 산뜻하면서도 감미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붓 터치 역시 경계가 불분명하게 문지르듯 감각적이어서 화폭을 몽환적인 느낌으로 몰아가고 있다.

바그너의 낭만 정신과 낭만적 오페라는 화가의 기법마저 낭만적으로 바꿀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새 시대를 맞이한 19세기인들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채워준 그 장엄한 악극은 수많은 ‘바그너 마니아’를 낳았다. 팡텡-라투르도 그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명화와 함께 듣는 명곡 -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 서곡

트롬본, 오보에 같은 금관악기를 전면에 내세우고 오케스트라의 최상석을 차지하던 바이올린에 들러리의 수모를 안긴 작곡가는 누굴까. 답은 독일의 낭만파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오페라 ‘탄호이저’의 서곡은 그중 대표적인 예다.

그가 관례를 깨고 이처럼 새롭게 오케스트라를 운용한 것은 장중한 느낌의 극대화를 노린 것이다. 보조적 역할에 머물렀던 트롬본이 마치 거대한 뱃고동을 치듯 음악의 흐름을 리드해 나가게 하고 ‘오케스트라의 꽃’ 바이올린에 장식음을 연주하는 부차적인 역할을 맡김으로써 장엄한 무대를 갈망하는 관객의 욕구를 채우려 했다. 물론 그의 의도는 성공적이었다.

오페라 ‘탄호이저’는 바그너가 파리에서 돌아온 1842년 구상해 이듬해 리브레토를 완성했고 1845년 드레스덴에서 초연했다. 서곡은 오페라의 전체적 윤곽을 잡은 후 마지막으로 완성했다고 한다. 이제는 주옥 같은 아리아들을 제치고 오페라 ‘탄호이저’의 트레이드 마크가 돼 클래식 콘서트에서 독립 레퍼토리로 연주될 정도다. 바그너의 세계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제일 먼저 이 곡을 권한다. 육체적 사랑에 대한 정신적 사랑의 위대한 승리를 느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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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범 문화전문기자 · 미술사학박사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