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무하마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1977년 중동 평화협상을 위해 이스라엘을 방문하자 격노한 사람이 있었다. 1971년 이집트 시리아와 함께 아랍공화국연방을 결성했던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였다. 그는 이집트의 배신이라며 공동으로 쓰고 있던 국기를 바꿔버렸다. 이집트도 얼마 뒤 국기 문장(紋章) 속의 매를 독수리로 교체하면서 아랍공화국연방은 유명무실해 졌다.

'아랍의 영웅'을 꿈꿨던 카다피는 영화 제작도 지원했다. 20세기 초 이탈리아에 맞서 싸운 우마르 묵타르의 활약상을 그린 1981년 작 '사막의 라이언'이다. 앤서니 퀸이 주연한 이 영화 제작비 3500만달러의 상당부분을 그가 댔다. 포로가 돼서도 '승리 아니면 죽음'을 외치다 교수형 당한 묵타르와 자신을 동일시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극장 수입이 100만달러에도 못미쳐 흥행엔 실패했다.

각종 테러에 개입하며 서방세계와 대립하다 보니 신변 보호에 유달리 신경을 썼다. 폭격과 암살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거처를 알리지 않고 자주 옮겨다녔다. 한때는 미니 밴에 텐트 식량 등을 싣고 떠돌기도 했다. 미녀에 대한 관심도 유별났다. '아마조네스'로 불리는 40여명의 미녀 경호원이 거처를 지킨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11월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회의 참석차 로마를 방문했을 때는 100여명의 미녀를 특별초청해 '이슬람은 결코 여성을 우습게 보지 않는다'는 요지의 강연을 했다. 키 170㎝ 이상,나이 18~35세의 미녀들에게 강연 참석의 대가로 60유로(약 9만3500원)씩을 줬다고 한다.

걸핏하면 '국민은 나를 사랑한다'고 우기던 카다피도 '재스민 혁명' 격랑을 피해가지 못했다. 나토연합군과 시민군의 공격에 근거지의 대부분을 내주고 자신은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1969년 27세의 나이로 쿠데타에 성공해 권력을 장악한 지 42년 만이다. 결사항전 망명 은둔 자살 등 여러 예측이 나온다.

1942년생 동갑에다 장기 집권,반미 등 닮은 점이 많은 김정일 위원장은 카다피의 몰락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독재와 인권탄압,국제사회 고립은 언젠가 종말을 맞는다는 교훈을 얻으면 좋으련만 그럴 기미는 없다. 오히려 2003년 카다피의 핵 포기를 큰 실책으로 여기고 핵 개발에 더 매달릴 가능성이 높다. 중동의 민주화 바람이 한반도 비핵화를 더 꼬이게 할까 걱정이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