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이 "예스"라고 말한다면 "메이비(maybe · 아마도)"로 받아들여야 한다. "메이비"라고 하면 "노"라는 의미다. 하지만 실제로 "노"라고 한다면 그는 외교관이 아니다. 외교무대에선 언제나 격식을 갖춰 조심스럽게 말을 해야 한다는 유머다.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도 '결렬'대신 '합의할 게 없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에둘러 말하는 식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속내를 드러내거나 조그만 실수라도 하면 파장이 일기 때문이다. 1993년 APEC회담에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가 불참한 것에 대해 키팅 호주 총리가 얼결에 '까탈스러운(recalcitrant)'이라는 말을 뱉었다. 발끈한 말레이시아 측은 호주 상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유학생도 보내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내놨다. 키팅은 유감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1996년 9월 북한 잠수함이 강릉 앞바다로 침투했을 때 워런 크리스토퍼 미 국무장관은 "남북한 모두 자제해 달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도발을 한 건 북한인데 우방인 미국이 이럴 수 있냐는 여론이 한국에서 들끓었다. 미 국무부는 "장관이 착각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실은 그게 미국의 속마음이었다.

회담장에선 큰 소리로 티격태격하고도 바깥에선 전혀 티를 내지 말아야 하는 게 외교관이다. 자국 의견을 대변하고 비밀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상대국으로부터 의심을 받는 경우도 많다. 반면 상대국의 입장을 너무 감안하다 보면 자국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외교란 조국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애국적 행위'라는 말까지 있다.

폭로전문 인터넷 사이트 위키리크스가 미 외교문서 전문을 공개함으로써 세계 외교가가 발칵 뒤집혔다. 외교무대 이면에서 벌어진 시시콜콜한 일들과 내밀한 정보,인물평 등이 여과없이 드러났으니 그럴 수밖에.한국과 관련해서도 '북한 고위관리들이 올해 초 망명했다''6자회담 중국 수석대표인 우다웨이가 거만하고 무능하다' 등 민감한 내용이 들어 있어 외교부가 당혹스러워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은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언 어샌지에게 간첩법을 적용하는 방안을 모색중이고,인터폴은 그를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당분간 외교관들은 사석에서도 입을 꾹 다문 채 눈치만 보게 생겼다. 침묵은 금이라지만 할 말은 해야하는 법인데 참 딱하게 됐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