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에서 딸과 이별하는 장면을 보니까 정말 제가 찍은 게 맞나 싶어요. 제가 맡았던 어떤 엄마 배역보다 잘 나왔어요. 연기 도중 '그분'이 오셨나봐요. 지난해 11월 추운 날,이 장면을 찍고 30분간 주저앉아 일어서질 못했죠.경련이 일어서요. "

흥행 연극 '친정엄마와 2박3일'을 원작으로 한 영화 '친정 엄마'(22일 개봉 · 유성엽 감독)의 주연배우 김해숙씨(55).그는 절정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녀는 그동안 꾹꾹 눌렀던 감정의 응어리를 확 터뜨린다. 관객들의 눈시울도 금세 뜨거워진다. '친정 엄마'는 암선고를 받은 방송작가 딸이 엄마와 함께 보낸 2박3일을 그린 멜로영화.김씨를 8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흥행코드나 영화적인 장치가 없어 밋밋했어요. 그러나 딸과 엄마의 인생이 오롯이 담겨 있더군요. 현실적인 모정을 파헤쳐 진정한 한국의 어머니상을 제시하고 싶었어요. "

그는 최근 한국 영화 속의 엄마 배역이 다채로워졌다고 했다. 엄마 역이라도 배우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할리우드 영화를 닮아간다는 의미다.

"나이를 먹어 엄마 역에만 묻히는 것은 연기자로 속상한 일이죠.그런데 다른 엄마를 연기하는 건 제게 활력을 줍니다. 어머니란 고정관념에서 탈피하고 싶거든요. 사람 성격에 따라 어머니 성격도 달라요. 엄마가 아닌 인간으로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가 많이 나와야 풍성해지죠.최근 제가 출연한 세 작품의 엄마 역도 모두 달라요. "

지난해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 '박쥐'에서 그는 식물인간이 된 상황에서 아들을 향한 뜨거운 모성을 표현했다. 어둡고 병적인 모정이었다. 요즘 방송 중인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에서는 자신의 일과 자식들을 똑같이 사랑하는 '슈퍼맘'으로 나온다. 그는 자신과 가장 닮은 모습이라고 했다.

"'친정 엄마'는 딸만 위해 사는 엄마 역이에요. 딸이 곧 자아죠.연기하면서 과연 이런 엄마가 될 수 있을까 궁금했어요. 저도 자식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대답하겠지만 제 일이 있고 자아도 있거든요. 친정엄마 캐릭터와 비교하면 자식(두 딸)한테서 제 인생의 절반을 빼앗아온 셈이죠.집안에선 두 딸을 키우며 살림하지만 밖에서는 배우 생활을 하니까요. "

극중의 그녀는 정읍에서 가장 극성스런 엄마다. 모든 행동이 딸과 관련돼 있으니 두려울 게 없다. 꿈에서도 딸을 만날 것만 같다. 딸이 죽은 후에는 멀쩡하게 살아있는 자신이 밉다. 반면 극중 아들은 구박한다. 남편이나 사위도 딸에 비해 존재감이 약하다.

"실제로 아들보다는 딸이 엄마와 더 가깝다고 생각해요. 같은 여자니까요. 더욱이 극중에서처럼 못 배운 엄마에게 영리한 딸은 대리만족을 주거든요. "

그녀는 "거동이 불편하신 아흔 네살의 친정엄마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엄마는 늘 곁에 계실거라고 착각했는데 뒤돌아보니까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예요. 어머니를 모든 일의 우선 순위로 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어머니를 위해 2박3일간 여행을 가기는 어렵겠지만 이 영화가 어머니와 2시간 정도 데이트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