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들이 고산에 오르는 방법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다. 첫째는 이른바 극지법 등반.히말라야 같은 큰 산을 등반하기 위해 본거지를 설치하고 차례로 캠프를 세우면서 정상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흔히 등정주의 등반이라고 한다. 극지법 등반은 높은 정상에 오르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이므로 그 목표를 위해 방대한 장비와 물자,그리고 많은 전문 인력들이 동원된다. 이 등반에서 가치의 중심은 등반과정에 있는 게 아니라 얼마나 높이 오르는가 하는 최종목표의 높이 서열에 있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다 높은 곳을 정복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 등반방법으로서,힐러리 경이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이후 세계 산악계에서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 전근대적 등반방법이다.
두 번째 방법은 알파인 스타일.등로주의 등반이라고 명명되기도 하는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에서 가치의 중심은 최종높이가 아니라 등반과정에 있다. 일반적인 코스보다 더 위험한 새로운 코스를 선택해 타인이나 장비의 도움을 최소화해서 오로지 오르는 사람의 고유한 판단과 감각에 의존해 정상을 오르는 실존주의적 등반방법이다. 오늘날 세계 클라이밍의 추세는 단연코 이 알파인 스타일에 방점이 찍혀 있다.
삶의 길이라고 뭐 다르겠는가. 자본주의적 무한 경쟁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세상에서,우리가 그 경쟁의 게임 속으로 뛰어들 때 먼저 주체적으로 결정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등정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수단과 방법을 가릴 것 없이 오직 높이의 최고를 겨냥할 것인가. 아니면 남과 상대적으로 경쟁해가는 높이 서열에 대한 목표는 차선으로 미뤄두고,그것보다 먼저 주체의 고유성을 좇아 내가 원하는 '봉우리'를 찾아 그것을 내 에너지와 판단력에 따라 오르고,그런 다음 그것을 '내 봉우리'로 삼는 것에 더 가치를 둘 것인가. 선택은 물론 각자의 몫이다.
지난 반세기,우리 모두가 각개약진으로 뛰고 달렸던 삶의 산행에서 보편적으로 선택했던 방법은 단연코 극지법,곧 등정주의 등반 방법이었다.
일단 높이에 따른 '정상'만을 염두에 두고 오로지 '일등'만을 향해 달렸던 이 전근대적인 등산방법은,개발 이데올로기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면서 아이로니컬하게도 '조용한 아침의 나라' 백성이었던 우리 모두의 가장 보편적인 삶의 방법으로 차용됐다.
이 방법의 삶에선 오직 매출목표나 직위의 서열같은 외형적인 가치만이 존중됐고,그래서 게임의 룰은 무화(無化)되기 일쑤였으며,자신의 정체성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높이 올라도 더,더 높은 봉우리가 보일 뿐,만족감에 이르기는 어렵다.
삶은 스포츠와 다르다. 바구니에 공을 집어넣는 숫자의 서열만으로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는 식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다양성과 위대성을 송두리째 부정하거나 한정시키는 결과에 닿을 뿐이다. 어떤 높이에 도달하든지 간에 인간은 내면가치에 따른 만족감을 수반하지 않는 한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나의 정상'이다. 삶에서,모든 이가 다 에베레스트를 오를 수는 없다. 세계엔 얼마나 봉우리가 많은가. 높든 낮든 상관없이,내 본원적 그리움과 지향에 따라 '나의 정상'을 찾아내는 것이 만족감을 얻는 일차적 관문일 것이고,그 다음엔 그것을 향한 나만의 길을 찾아내고 오르는 것이 성공으로 가는 이차적 관문일 것이다. 대통령이 일찍이 말한 바 '국민성공시대'라는 것이 높이경쟁의 가치가 아니라 모든 이가 각자의 정상을 오르는 고유성의 가치발견을 말하는 것이었기를 진실로 바란다. 경제가 어려운 이런 때야말로 어쩌면 자신의 내면가치를 발견하기가 보다 더 쉬운 때일지도 모른다.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가는 언제나 자신의 '봉우리'를 찾아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