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피할 수 없는 덧없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영원한 삶에 대한 열망을 담아낸 게 예술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예술가는 가도 예술은 살아남아 언제까지나 그 영혼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왜 아니랴.셰익스피어의 실존 여부 논란에 상관없이 햄릿은 살아있고,박지원의 '호질'과 '양반전'은 지금도 허울에 사로잡힌 이들을 질타한다.
모차르트는 겨우 35년 동안 살고 갔지만 그의 음악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평생 가난과 외로움에 시달린 고흐의 작품은 미술품 경매가를 끝없이 경신한다.
노르웨이 화가 뭉크(Edvard Munch,1863~1944)의 그림 '절규'(캔버스에 유채,83.5×66cm,1893년) 역시 마찬가지다.
핏빛 하늘 아래 곧장 무너져 내리는 다리 위에서 퀭한 눈의 유령같은 인물이 일그러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있는 모습은 발표된 지 113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보는 사람을 꼼짝 못하게 사로잡는다.
추정가 5억크로네(약 758억원)가 넘는다는 그림은 충격적이다.
앞사람이 그토록 울부짖고 있는데도 뒤에 서 있는 두 명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하고 물 위의 배와 교회의 탑도 고요하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가운데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혹은 굴러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떠는 인간의 내면을 대변한다고 할까.
뭉크는 표현주의의 대가다.
어려서 어머니와 누이를 잃고 평생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시달렸다.
뛰어난 재능으로 당대에 널리 인정받았지만 나치 정권에 의해 게르만 예술의 모범으로 추앙됐다 하루아침에 퇴폐예술로 낙인찍혀 작품을 몰수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질투''다리 위''저녁시간'등 그의 그림이 현대인의 끝없는 고독과 우울을 대변한다는 평을 받는 것도 그같은 삶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004년 도둑 맞았던 뭉크미술관 소장 '절규'가 회수됐다고 한다.
붉게 물든 하늘과 검푸른 강물,출렁거리는 화면 속에 절규하는 이 그림이 국내에서도 주목받는 건 무슨 까닭인가.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