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煊日 < 경희대 교수·상법학 >

새만금간척사업을 국고사업이 아닌 프로젝트 금융방식으로 추진(推進)하였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동안 일부 전북 주민과 환경단체들이 제기한 소송에 휘말려 사업은 지지부진함을 면치 못하고, 이 사업에 돈을 댄 투자자와 사업비를 대출해 준 은행들은 한숨만 쉬고 있었을 것이다.

2003년 6월 국제은행들이 '적도원칙'(Equator Principles)을 선언한 것은 개도국에서 시행되는 발전소, 고속도로 건설 등의 대형 프로젝트에 금융지원을 할 때 대출금 회수에 차질이 생기는 위험을 방지하고 환경보존에 열심이라는 기업PR를 하려는 의도가 컸다.

적도원칙이란 세계은행 그룹에서 수립한 환경 및 사회적 정책기준에 따라 프로젝트 금융을 공여하기로 하는 금융회사들의 자발적인 행동원칙을 말한다.

환경 및 사회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프로젝트에는 돈을 빌려주지 않겠다는 금융회사들의 행동원칙에 '적도(赤道)'라는 이름이 붙여진 연유는 이러하다.

2002년 이 운동을 주도한 국제금융공사(IFC)와 참가은행들의 대표가 런던 그리니치에서 자주 회동을 하였기에 처음에는 '그리니치 원칙'이라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프로젝트가 주로 개도국에서 시행되는 만큼 열대우림을 연상케 하는 '적도원칙'으로 이름을 바꿔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적도원칙이 시행 3년 만에 대폭 수정되었다.

IFC와 참가은행들의 시행경험을 살리고 주요 고객, 환경단체들의 요망사항을 반영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종래 적도원칙은 5000만달러가 넘는 개도국에서의 대형 프로젝트에 한하여 적용되었기에 나머지 프로젝트는 환경을 해쳐도 된다는 면죄부를 주는 셈이고, 참가은행들이 적도원칙을 일관성있게 적용하지 않아도 제재할 방도가 없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달 6일 새로 개정된 적도원칙은 대상사업의 규모를 1000만달러로 크게 낮추고 개도국·선진국의 구분 없이 대상사업을 불문하고 적용하기로 했다.

금융회사가 프로젝트 금융자문을 할 때부터 이 원칙을 적용하되, 기존 시설을 개량하거나 증설하는 경우에도 환경 및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면 적도원칙을 적용하게 된다.

다만, 이미 엄격한 환경기준을 시행하고 있는 나라(OECD 회원국 중 세계은행 기준 상위소득국)에서는 시행을 간소화할 수 있으나, 참가은행은 매년 그 이행상황을 연차보고서에 밝혀야 한다.

이에 따라 적도원칙을 채택하는 은행에 대출을 신청(申請)하려면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이 붙게 된다.

예컨대 환경을 크게 훼손하거나 원주민의 이주가 필요한 사업은 그 정도에 따라 '카테고리A' 또는 '카테고리B'라 하여 차주가 직접 환경영향평가를 실시하고 환경 및 사회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행동계획을 제시해야 한다.

사업시행자나 스폰서는 환경영향평가에서 문제가 된 사항에 대하여 현지법규에서 요구하는 조치를 취함은 물론 이를 지속적으로 이행하는지 모니터링 시스템을 갖추고 이러한 내용을 계약서에 포함시켜야 은행대출을 받을 수 있다.

새로 개정된 적도원칙에 의하면 차주 또는 스폰서가 직접 나서서 지역주민,환경단체와 원만한 협의를 벌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미즈호,미쓰비시-도쿄UFJ, 스미토모-미쓰이 은행 등이 개정된 적도원칙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국내 은행들은 아직 관망하고 있는 상태이나, 해외건설업체들은 환경영향이 큰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주도면밀(周到綿密)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수주 자체가 힘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씨티그룹, ABN-AMRO, 홍콩상하이은행 등 적도원칙 참가은행이 세계 프로젝트 금융시장의 70~80%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만금사업의 예에서 보았듯이 국민의 환경에 대한 인식과 여론이 대규모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 은행들도 프로젝트 위험관리 및 기업이미지 개선을 위해 100억원이 넘는 국내외 대형사업에는 '적도원칙'을 적용한다고 선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