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산 < 소설가 > 우리는 단군 이래로 5000년간 순수혈통의 단일민족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2000년 전 역사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한반도에 살던 마한 진한 변한의 토착민 세력이 있었고 북방에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뿌리로 알려진 예맥(濊貊)족과 부여족이 있었다. 신라와 가야 종족은 이들과 또 다르다. 지금까지 연구된 바로 신라 지배층은 훈족(흉노족)의 한 갈래가 바다를 통해 들어왔다는 게 정설이고 가야는 널리 알려진 수로왕과 허황옥의 로맨스에서 보듯 인도 계통의 유민 집단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삼국시대엔 고구려 백제 신라뿐 아니라 이들과 500년간 존속한 가야 6국까지 포함해 한반도에 살던 모든 나라 백성들이 서로 동족(同族)이란 개념을 가지지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역사에서 단군과 단일민족을 강조한 대표적인 경우가 고려 중기의 문신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紀)'와 단재 신채호가 저술한 '조선상고사'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제왕운기가 집필된 시기는 원나라 침략으로 고려조가 주권을 잃었을 때고 단재 역시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분이다. 두 경우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얘기다. 특히 단재는 신문에 연재한 미완성의 논설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신라가 외세인 당을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했다고 주장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확한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연전에 지금 일본 일왕이 즉위식에서 자신의 조상을 도래한 백제인이라고 밝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상대의 적대감이나 경계심을 무너뜨리는 데는 혈연 만한 게 없다. 당연히 우리는 그가 백제인의 후예라고 밝힌 점에 주목했고 상당한 호감과 친밀감을 품었던 게 사실이다. 한 세대가 가면 또 한 세대가 오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요즘 젊은이들은 반미를 외치면서도 나이키와 맥도날드를 찾고 재즈를 듣고 일본 드라마를 보면서 월드컵에선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친다. 우리나라 젊은이들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지구촌이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소비문화에 노출돼 자라온 세대들을 주축으로 취향과 이념이 분명하게 나뉘고 심지어 휴대폰과 MP3, 노트북 같은 첨단장비를 갖추고 세계를 돌아다니는 '유로노마드(Euronomad)' 또는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족도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다. 그렇다고 이들의 이념이나 행동이 과거에 비해 덜 애국·애족적인 것은 아니다. 이슈가 생기거나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 땐 누구 못지않게 열정적으로 뭉치고 단결한다. 우리도 2002년 월드컵에서, 또 지금 다시 달아오르는 월드컵 열기에서 그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만 순수혈통과 단일민족을 주장하는 정신적 쇄국주의를 고수하는 일이 국익과 민족발전에 무슨 이득이 되겠는가. 일왕이 즉위식에서 자신을 가리켜 굳이 백제인의 후예라고 밝힌 까닭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미국 부시 행정부와 아랍권 국가들의 충돌처럼 지나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전 인류를 위태롭게 만드는 국제분쟁의 원인이 된다. 북한의 고립도 말끝마다 위대한 장군님을 외치는 그들만의 위험한 단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고 문명이 바뀌면 그에 맞는 새로운 이념과 세상을 멀리 내다보는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 지속적인 국가발전과 민족번영을 기대할 수 있다. 이 거룩한 삼일절 아침 '세계의 변조(變潮)를 승(乘)한 오인(吾人)'이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하는 진정한 삼일정신의 계승에 대해 생각해본다. /대하소설 '삼한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