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 아마 80년대 쯤이었을 것이다. 루이제 린저가 북한을 방문해 '주체 교육은 하나의 국제적인 모범'이라고 썼던 것이….어디 그녀 뿐이었던가. 앙드레 지드나 사르트르 또한 사회주의 공화국 만세를 앞서거니 뒤따르거니 합창했었다. 당대의 유행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문인들의 지적 허영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다. 진실이 드러나고 그들은 입을 닫았지만 고통받는 민중들에 대한 사죄나 변명의 말을 과문한 탓인지 들어본 바가 없다. 하기야 서울에서는 때늦은 김일성 통일전쟁 만세가 울려퍼지는 상황이다. 과도한 비판 의식은 때로 지식인조차 낭만적 허위의식의 길로 유혹한다. 한때를 풍미하던 사회주의 호교론이 반(反)세계화와 반시장 운동으로 전환되는 데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68혁명'에 힘입은 로마 클럽에서부터 반세계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종말론적 세계관은 언제나 적지않은 우군을 확보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낭만적 단어와 지극한 선의(善意)로 포장되어있기 때문에 순수한 학생들과 어설픈 정치가들을 끌어들이는 데 안성맞춤이다.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악당들의 체제이며 세계화는 다국적 기업들의 세계 착취 음모'라는 주장은 이미 코카콜라 만큼이나 세계화된 CM송이요 상표가 되었다. '세계화'가 각국 국민들의 문화적 다양성을 봉쇄하고 양극화를 조장한다는 논리는, 경제가 발전할수록 환경이 파괴되고 양극화가 심화된다는 허위 명제 만큼이나 이미 굳건하게 뿌리를 내렸다. '시장경제의 세계화'에 악당의 이미지를 덧쒸우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세를 악(惡)의 시대로 선포하는 사이비 종말론과 얼개가 다르지 않다. 지금 부산에서 반(反)APEC 세계대회를 도모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신학적 토대 위에 자신들의 주장을 세우고 있는 것인가. 세계화란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헬레니즘이나 로마나 중화권 문명과 최근세의 근대화 과정에서 피보나치 곡선처럼 동심원적으로 되풀이되어온 문명 전파의 한 발전적 패턴일 뿐이다. 반세계화 논리가 고립된 자연 상태에서 나무를 베어 땔감으로 쓰고 불을 질러 화전 농사를 짓자는 식이라면 더이상의 논쟁도 필요없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삶과 환경을 파괴하는 지름길인 것을…. 농업적 폐쇄 사회에서 민중의 삶이 어땠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을 통해 중산층과 자유시민이 형성되는 과정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반시장론도 마찬가지다. 시장경제 없이도 혹은 없어야 행복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감옥 속에서 혹은 감옥에 들어가야 자유롭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근대화된 산업과 시장경제 없이도 행복한 사람은 극소수의 탈속 위인이나 전통적인 착취 계급일 뿐이다. 시장이야말로 인간을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것을 부인한다면 그들은 계급사회의 옹호자이거나 지상에서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몽상가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반시장주의자들은 궁극적으로 반민중적이며 과격한 주지주의자들이며 결과적으로 전통사회를 낭만적으로 향수하는 자들이다. 양극화라고 비난하지만 중국 인민을 굶주림의 공포에서 해방시킨 것이 시장경제요 산업화며 세계화다. 한국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여성을 해방시킨 것도 20세기들어 풀가동되던 공장들인 것이며.공장이야말로 여성을 스스로 두발로 일어서게한 디딤돌이다. 그래 시장경제가 도대체 어쨌다는 말인가! 심지어 교육조차 대량 생산되는 제도 교육 아닌 다른 어떤 대안이 있는지 말해달라.바로 그 때문에 무엇이 진정한 진보냐고 묻는다면 나는 '시장이 진보이며 세계화가 진보'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