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06.04.03 02:20
수정2006.04.03 02:22
EU헌법 비준과 차기 예산안 처리를 둘러싼 진통에 이어 이번에는 경제노선을 놓고 이념 논쟁에 휩싸이고 있다.
다음달부터 EU 순회의장을 맡게 될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가 23일 글로벌시대에 맞는 자유시장 체제로의 개혁을 촉구한데 대해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독일 프랑스 등 다른 회원국이 반발,충돌을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회원국간 사사건건 이견을 표출하고 있어 EU호는 상당기간 정상 운행이 힘들 것이란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블레어 총리의 '글로벌 경제론'
영국 블레어 총리는 이날 벨기에 브뤼셀 EU의회에서 향후 6개월 간 순회의장으로서 추진할 아젠다를 밝히는 기조연설을 통해 "강력한 경제개혁만이 비생산적인 유럽 사회주의 모델을 바꿀수 있다"며 신자유주의적 글로벌 경제론을 주장했다.
그는 글로벌 경제에 대응하기 위해 EU예산 구조부터 뜯어고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체 예산의 40%를 농업보조금에 지원하는 현행 구조는 글로벌경제 시대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농업보조금을 삭감하는 대신 연구개발 및 교육분야 투자를 늘리자는 입장이다.
인도의 하이테크 분야 배출인력은 이미 유럽을 앞서고 있으며 중국의 연구개발 투자예산은 유럽의 3배에 달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예산안 개편이 시급하다는 게 블레어 총리의 논리다.
블레어 총리는 또 "영국의 실업률이 5%로 회원국 평균(8.5%)보다 낮은 것은 그동안 시장경제 원칙에 입각한 경제개혁 때문이었다"며 회원국에 경제개혁 노력을 촉구했다.
블레어 총리의 주장은 최근 유럽정상들에게 성장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구조개혁을 더 해야 한다고 촉구했던 존 스노 미국 재무장관의 발언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반발하는 독일과 프랑스
블레어 총리의 글로벌경제론에 대해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EU 분열을 조장하는 구상"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EU헌법 비준절차를 무기연기 하는 등 유럽통합에 거부감을 보이고 있는 영국이 경제개혁을 촉구하면서 통합 초점을 퇴색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EU헌법 제정을 통한 정치적 통합에 적극적인 슈뢰더 총리는 "EU를 자유무역지대로만 만들려고 하는 것이냐"며 블레어 총리를 공격하고 있다.
프랑스 역시 블레어 총리의 예산안 개편계획을 EU 분담금을 계속 돌려받기 위한 술책이라고 깎아 내리고 있다.
오는 2013년까지 농업보조금을 EU예산에서 지급하기로 이미 2002년에 합의가 이뤄졌던 것을 블레어 총리가 '농업보조금 삭감'을 주장하며 뒤엎으려고 하는 것은 영국의 분담금 환급과 연계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블레어 총리는 지난번 유럽의회 연설에서 "EU는 단순한 경제협력체가 아닌 정치 공동체"라며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지만 이미 벌어진 프랑스·독일과의 간극을 메울 수 있을 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각국 지도력 회복이 관건
EU를 주도하는 영국과 프랑스·독일 간 잇단 파열음은 3국 지도자들의 인기도 하락 때문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블레어 총리는 올해 노동당의 3기 연속집권에 성공했지만 이라크 파병과정에서 거짓진술 논란 여파로 조기 퇴진 가능성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다. EU헌법 부결여파로 코너에 몰린 프랑스 시라크 대통령과 지방선거에서 연이어 패배한 슈뢰더 총리 역시 인기가 바닥권이다.
이 때문에 세 정상들은 EU통합 자체보다는 자국 유권자를 겨냥한 정치적 행보를 거듭할 수밖에 없어 대외정책을 둘러싸고 계속 갈등을 빚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EU 일각에서는 블레어 총리와 코드가 맞는 것으로 알려진 독일 기독민주연합(CDU)의 안겔라 메르켈 총재가 관측대로 오는 9월께 총리에 선임될 경우 EU 정상화를 위한 모종의 돌파구가 마련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김호영 기자 hy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