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관리(회사정리절차)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약정은 무효라는 판결이 처음 나왔다. 법정관리 제도의 목적이 해당 기업 정상화에 있다는 관점에서 기업회생 취지에 반하는 모든 약정은 효력을 잃을 수 있다는 판단을 법원이 분명히 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번 판결로 위스키 브랜드 '발렌타인'으로 유명한 진로발렌타인스 지분의 100%를 확보하려던 영국계 기업 얼라이드 도멕 피엘씨사(이하 도멕사)의 계획에도 제동이 걸렸다. 서울고법 민사1부(노영보 부장판사)는 16일 주식회사 진로와 합작투자 계약을 체결한 도멕사가 "진로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합작투자 계약을 해지하고 진로 소유의 진로발렌타인 주식에 대해 우선매수 청구권을 갖기로 했다"며 진로의 법정관리인 박유광씨를 상대로 낸 정리채권 확정 판결에서 원심을 깨고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기존에 맺은 계약을 깰 수 있다는 약정이 무효라고 판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계약의 한 당사자가 법정관리에 들어갔다는 사실 때문에 합작투자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한 약정은 기업을 회생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법정관리의 취지에 정면으로 배치되고 관리인의 회사 재산에 대한 관리 처분권을 침해하므로 양사가 맺은 이러한 약정은 효력이 없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따라서 재판부는 "그 약정에 의거해 진로가 가지고 있는 진로발렌타인스 주식 27만여주(약 574억원어치,우선주 포함)를 도멕사에 우선 인도해야 한다는 조건도 성립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로써 진로발렌타인스 지분을 모두 거머쥐려 한 도멕사의 계획은 일단 무산됐다. 현재 도멕사는 진로발렌타인스 주식 70%를 보유하고 있고 나머지 30%는 진로가 가지고 있다. 이번 사건에서 진로측을 대리한 법무법인 화우의 한상구 변호사는 "일본과 미국에는 이번 판결과 동일한 판례가 있거나 법으로 이미 명문화돼 있다"며 "이번 판결로 국내에서도 법정관리 중인 기업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당하는 경우가 상당 부분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도멕사와 진로는 1999년 12월 합작투자 형태로 진로발렌타인스를 세우는 과정에서 진로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등 양사 간에 '중대한 의무 위반 사유'가 있으면 합작투자 계약을 파기하고 동시에 진로가 가지고 있는 진로발렌타인스 주식 전부에 대해 도멕사가 우선매수 청구권을 갖기로 계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2003년 5월 진로가 법정관리에 들어가자 도멕사는 진로가 보유한 진로발렌타인스 주식의 우선매수 청구권이 자신들에게 있다며 같은 해 10월 소송을 제기,1심에서는 승소했었다. 당시 재판부는 "도멕사가 합작투자 계약을 해지할 수 있으므로 도멕사나 도멕사가 지정하는 자가 진로가 소유한 진로발렌타인스 주식을 살 수 있는 권리를 우선적으로 보유한다"고 판시했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