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의 발상지인 유럽의 노동조합도 개량화 관료화돼가고 있다.앞으로는 파업 에너지가 넘쳐나는 한국의 노동계가 세계 노동운동을 주도해야 한다." 80년대 노학(勞學)연대투쟁에 나선 운동권 대학생들이 현장 노동자들을 부추키기 위해 내걸었던 선동구호가 아니다. 현실 상황을 알만큼 아는 나이의 유명 대학교수가 노동관련 저서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좌파학자로 분류되는 이 대학교수는 노동운동이 임금인상이나 고용보장 투쟁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와 노동해방을 위한 계급투쟁을 펼쳐야 한다고 부추기고 있다. 우리나라 노동현장이 아직도 '투쟁의 덫'에 걸려있는 데는 이처럼 투쟁만능주의에 집착하는 좌파학자들의 책임도 적지않은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현실을 외면하는 이들의 좌파이념이 각종 세미나와 강의 서적 논문 등을 통해 현장 근로자들에게 그대로 전달돼 노사분규의 씨앗이 되고 있다는 것. 좌파학자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노동단체의 운동노선에까지 끼어들어 조직 내 갈등을 부추기기도 한다.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의 대화 참여를 놓고 강·온파 간 충돌이 일어난 지난 2월 김세균 서울대 정치학과교수,오세철 전 연세대교수 등 좌파성향의 학자 58명은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 참여를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 체제에 매달린다면 민주노조운동의 깃발을 내리는 것과 같다"는 이유를 들어 사회적 교섭안의 폐기를 요구한 성명이다. 이들은 "국내외 총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는 공세를 저지하려면 총파업투쟁을 포함한 노동자 대중의 총력투쟁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제반 국내외 세력과의 강고한 연대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사회적 대화는 자본에 유리할 수 있으니,투쟁으로 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같은 논리가 노동현장의 좌파세력에 그대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노사정위의 대화 복귀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민주노총이 올들어 3차례에 걸쳐 대의원대회를 열었으나 대화를 반대하는 좌파세력들의 폭력 저지로 표결조차 실시하지 못하고 무산됐다. 좌파학자들의 계급투쟁론을 노동운동의 본질로 인식하고 있는 강경파 운동가들은 "사회적 대화는 자본과 정부의 의도대로 노동자의 기본권이 말살되고 신자유주의 흐름에 끌려다닐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수용해선 안된다"는 논리를 폈다. 투쟁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좌파학자들의 투쟁만능주의가 노동자들을 '투사'로 만들면서 민주적 표결조차 못하도록 만든 셈이다. 좌파교수들이 많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진 인권위는 최근 뜻밖의 의견을 발표해 파장을 일으켰다. 노사 간 쟁점인 비정규직법안 내용에 대해 노사정이 핵심조항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권차원'이라며 노동계에 유리한 내용을 제시해 협상을 깨뜨려 버린 것이다. 탄력적으로 협상에 나섰던 노동계는 인권위 발표 후 물러설 여지가 없어지자 양대노총위원장이 공동기자회견을 자청,김대환 노동부 장관 사퇴와 인권위의 의견을 반영한 비정규직법안의 조속 처리를 요구하는 등 태도가 1백80도 달라져 버렸다. 김대환 노동부 장관은 인권위 발표와 관련,한 인터넷언론의 토론회에서 "잘 모르면 용감해진다"고 직설적으로 비난했다. 김 장관은 "비정규직 전문가도 없는 인권위가 단세포적 기준으로 지나치게 단순하게 접근했다"면서 "인권위 의견은 노동시장 선진화로 가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나타난 돌부리"라고 흥분했다. 대학교수시절 진보성향의 학자로 알려진 김 장관이 이처럼 태도가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실업자 비정규직 노사문제 등을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면서 현실인식을 갖지 않으면 국가경제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을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최영기 한국노동연구원장은 "민주주의 체제인 우리사회에서 이념적 스펙트럼은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지만 평등과 인간해방만을 중시하는 좌파학자들의 계급투쟁설은 노동현장을 혼란으로 몰아넣으며 기업경쟁력 약화와 일자리 감소를 부채질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많은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위해서라도 투쟁만 일삼지 말고 기업경쟁력 향상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