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맨해튼 남단을 좌우로 잇는 19번가.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밸리에 빗대 실리콘앨리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닷컴기업들의 고향중 하나다. 실리콘밸리의 자랑이 원천기술이라면 이곳은 적용기술이 앞선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곳.적어도 작년 이맘때까지는 그랬다. 이 19번가 14번지에 '허시'라는 나이트클럽이 있다. 평범한 나이트클럽인 이곳에선 매주 수요일 저녁 좀 색다른 행사가 벌어진다. 이른바 '핑크슬립'파티.주변의 닷컴기업에서 해고된 사람들이 모여 갑자기 일자리를 잃은 아픔을 술로 달래고 다른 일자리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는 모임이다. 파티를 주관하는 사람은 엘리슨 헤밍(33)이란 여성. 그녀 역시 지난해 6월 메릴린치의 인터넷파트에서 해고된 뒤 이 파티를 고안해 냈다. 1천명 이상의 닷커머들에게 해고통지서인 '핑크슬립'을 가져오면 입장과 자리배정의 우선권을 주겠다는 e메일을 보내는등 운영도 닷컴스타일로 했다. 파티의 재미를 더하고 실질적인 구인·구직 효과를 얻기 위해 해고자들은 핑크빛 완장을,리크루터들은 녹색 완장을 차도록 권유한다. 핑크슬립파티는 이제 유명한 이벤트가 됐다. 금융가인 인근 월스트리트의 펀드매니저와 애널리스트들이 머리를 식히러 구경오기도 한다. 헤밍은 비슷한 파티를 샌프란시코 필라델피아 등 한때 닷컴이 흥했던 지역에서 개최하는데 어느곳이든 파티 때마다 인산인해를 이룬다. 닷커머들은 과거에도 자신들만의 파티를 즐겼다. 창업준비생 시절인 90년대 초 세상을 바꾸겠다는 야심으로 하루 24시간 작업실에서 일할 때도 소호의 작은 다락방에서 틈을 내 파티를 즐겼다. 그리고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해고자가 돼 돌아와 여는 파티도 그때와 다를게 없다. 엄숙함은 찾아볼 수 없고 티셔츠 차림에 술병을 들고 춤추는 등 음악과 웃음,논쟁이 이어지는 그야말로 잔치분위기다. "많은 사람들이 파티가 계속되길 원하고 있다"는 헤밍은 "거품붕괴와 해고는 이들에게 세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시작일 뿐"이라고 말한다.닷컴은 몰락했어도 닷커머들은 흥겨운 마음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뉴욕=육동인 특파원 dong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