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아무리 돈을 더 풀어도 투자와 소비가 살아나지 않는다. 한국 경제는 유동성 함정에 빠질 우려가 농후하다"(정운찬 서울대 교수) "콜금리 인하 이후 은행 대출이 늘고 회사채 시장이 회복됐다. 한국은 유동성 함정에 빠진게 아니다"(정규영 한국은행 정책기획국장) 학계와 한은 사이에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 논쟁이 한껏 달아오르고 있다. 초(超)저금리에도 불구하고 실물경기 부양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서 급속히 제기되고 있는 유동성 함정론에 대해 한은은 1일 기자들에게 브리핑을 갖고 "유동성 함정에 빠진 게 아니다"라고 공식 반박했다. 최근의 '유동성 함정' 논란은 한은의 추가 콜금리 인하 여부에 대한 찬반논쟁으로 비화될 조짐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 현재로선 한국 경제도 일본처럼 유동성 함정에 빠져들어가고 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대기업 대출금리가 연 7%대로 사상 최저를 기록했지만 투자 소비 등 실물경기가 되살아날 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 정운찬 교수는 "저금리로 총통화(M2)가 지난 97년말에 비해 두 배 이상으로 늘었지만 투자와 소비는 늘지 않고 있다"며 "극단적으론 시중에 풀린 돈이 장롱 속에만 쌓이는 꼴이어서 유동성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그나마 증시가 활황일 땐 돈이 주식시장에서 돌았지만 지금은 부동산으로 흘러 인플레만 자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경제연구원 이인실 금융재정연구센터 소장도 "기업들이 투자를 않는 건 불확실성 때문"이라며 "지금의 저금리는 인플레 기대 심리를 키우고 이자 생활자들의 고통만 가중시키는 '나쁜 저금리'"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은은 금리인하로 금융시장 불안이 가시고 있다며 유동성 함정론을 일축했다. 정규영 국장은 "이달 초의 콜금리 인하 이후 은행의 대출과 유가증권 투자 등 민간 신용이 13조원 이상 늘었고 회사채 시장도 되살아났다"며 "한국 경제가 유동성 함정에 빠졌다고 얘기하는건 옳지 않다"고 밝혔다. 정 국장은 "물론 증시회복 등의 효과는 없었지만 투자와 소비는 6개월∼1년쯤의 시차를 두고 나타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어쨌든 유동성 함정 논란은 한은의 콜금리 인하 효과 여부에 대한 시각차로 연결되며 추가 인하 논쟁을 야기하고 있다. 정 교수는 "지금은 금리를 더 내릴 때가 아니라 구조조정을 착실히 하며 세계 경기 회복을 기다릴 때"라고 주장한 반면 정부 관계자는 "콜금리 추가 인하로 금융시장 기능을 더욱 활성화할 때"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차병석 기자 chab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