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아오문을 마교라고도 했는데 포르투칼인들이 "마카오"라고 음역한
것이다.
유럽 한쪽끝의 나라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에 온 것은 1513년이 처음이다.
그리고 해적토벌을 조건으로 당시 명나라로부터 4백명이 거주권을 획득한
것은 1557년이었다.
16~17세기에는 총독을 두고 중국정부에 매년 5백냥의 지세를 납부하면서
포르투갈의 아시아무역근거지로 번영을 거듭했다.
1862년 톈진조약으로 지배권을 강화한 포르투갈은 1887년 "마카오 할양에
대한 포르투갈.청 조약"을 맺어 영유권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19세기 중엽부터 중개무역의 중심이 홍콩으로 넘어가자 포르투갈은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인 1967년과 혼란기였던 74년에 마카오를
반환하려했으나 거절당했다.
마카오보다 훨씬 더 경제적으로 중요한 홍콩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우려한
중국의 정책적 술수였다.
오는 20일 0시를 기해 포르투갈령 마카오는 "차이니즈 마카오"로 다시
태어난다.
식민지가 된지 4백42년만의 일이다.
중국과 서구 사이에서 태어난 세계사의 기형적 사생아였던 상하이 칭다오
홍콩 등 영토안에 있던 식민지를 중국은 이제야 모두 되돌려 받았다.
마카오는 최초의 식민지이자 최후의 식민지로 역사속에 묻혀버리게 된다.
마카오는 유럽 대륙 남단의 해양문화와 중국대륙 남쪽 끝의 문화가 4백42년
동안 함께 해온 동서문화가 융합된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동양의 정원도시"로 불리면서 카지노등 유흥가가 유명한 관광도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카오의 역사적 공헌도 적지않다.
마카오는 중국 해상실크로드의 관문이었다.
또 가톨릭과 개신교의 선교 전진기지였다.
마테오 리치, 영국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은 이곳을 전진기지로 삼고
활동했다.
특히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신부가 이곳 파리외방전교회 조선신학교에서
6년동안 공부해 우리와는 인연이 깊다.
베이징 혁명역사박물관 건물벽에 붙여놓은 "안녕 마카오"란 대형글자는
식민지와의 영원한 결별을 고하는 중국인들의 선언이겠지만 마카오에 대한
아련한 향수도 담겨 있는 듯해 인상적이다.
식민지에서 벗어난 마카오의 미래가 궁금하기만 하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2월 14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