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란 얼굴에 이마가 드러나도록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 깨끗하게 손질한
초생달 눈썹, 빨간입술 사이로 하얀이가 다 드러나던 함박꽃같은 웃음.

자그마한 키에 화사한 투피스를 입고 언제나 방년 28세라고 말하던 영원한
프리마돈나 김자경선생이 먼길을 떠났다.

1917년 경기도 개성에서 아버지 김영환목사와 어머니 백열쇠 사이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그의 젊은날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이화여전 음악과 수석졸업(이왕직메달 수상), 국내 첫오페라 주연, 한국인
최초의 미국 카네기홀 독창회.

그러나 사랑하던 남편을 잃고 68년 혼자몸으로 오페라단을 창단한 뒤 그는
알뜰하고 억척스런 여인의 대명사가 됐다.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무대가 없어 주저앉는 제자들을 키우고 합창과
교향악등 국내음악 전반을 발전시키려면 어떻게든 오페라단을 빚없이 계속
운영해야 한다고 믿은 그는 난방비를 아끼려 한겨울 집안에서 외투를 걸치고
동대문시장에서 원단을 끊어다 직접 옷을 해입었다.

그래도 터무니 없이 모자라는 제작비때문에 정기공연 때만 되면 체면 불구
하고 스폰서를 찾고 표를 파느라 이리저리 숨가쁘게 뛰어다녔다.

뿐이랴.

"원효대사" 공연전 스님 2천명 앞에서 광고했는데도 한장의 표도 안팔리고,
"마농레스코" 도중엔 무대의 말이 감전돼 쓰러져 수십명이 끌고 나오는 등
어이없고 기막힌 일 또한 수없이 겪었다.

그런데도 오페라에 대한 열정은 식을줄 몰랐다.

주위의 걱정과 만류에 아랑곳없이 그만두기는 커녕 창단 당시 다짐했던 대로
2~3년에 한번은 꼭 한국창작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다.

"순교자" "심청전" "춘향전" "에스더" 등 10편은 그같은 노력의 산물이다.

외롭고 힘들 때면 혼자 거울을 보거나 피아노를 치며 큰소리로 노래불렀다는
그는 정말이지 캔디같은 만년소녀였다.

90년대초부터 심설이라는 아호로 서예와 동양화 작품을 발표하고 작고
직전까지 한양대 국악과 대학원생으로 민요공부에 열중했다.

이제 그는 가고 "꿈을 꾸면 늙지도 지치지도 않는다"던 그의 말만 귓가에
새롭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