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비그뉴 브레진스키 < 전 미국 국가안보 보좌관 >

미국은 러시아를 잃지 않았다.

미국은 처음부터 "잃어버릴 러시아"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물론 러시아의 자유민주 개혁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클린턴 행정부는 역사적
으로 직무태만의 혐의를 뒤집어 썼을 것이다.

러시아도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는 당연히 경제적 원조를 받을 권리가 있다.

러시아도 국제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발생한 러시아의 대규모 돈세탁 사건은 뭔가
근본적으로 크게 잘못돼 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최근 국내외 언론들은 러시아 마피아단이 미국 뉴욕은행을 통해 1백억달러의
검은돈을 세탁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의 다른 대형은행들과 유럽은행들도 연루돼 있다는 사실도 속속 드러
나고 있다.

이와관련, 미국민들의 세금으로 이뤄진 대 러시아 경제지원이 러시아에서
어떻게 배분되고 어떻게 사용됐는지 분명하게 밝혀져야 한다.

이는 미국 행정부가 러시아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가와 밀접
하게 관련돼 있다.

러시아에 대한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의 밑바탕에는 러시아가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으며 따라서 미국정부의 신뢰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지난 수년간 나온 미국의 수많은 공식 성명들은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을 미국의 진정한 민주적 동반자로 인정하고 지원과 협력을 약속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경제원조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이같은 기본 전제에 몰입한 나머지 미국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

바로 지금의 러시아정부가 과거 소비에트연방공화국에 비해 훨씬 더 자유
방임적인 인물들로 구성돼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집착은 그다지 강하지 않다.

또 기업가적인 청렴성도 대단치 않다.

미국은 러시아 핵심부의 실상을 정확히 모르고있는 것이다.

해외 지원금을 착복하고 검은 돈을 서방세계로 보내 세탁하는 행위는 지난
몇년간 지속돼 왔다.

이에 대해 러시아내의 진정한 민주 인사들과 일부 서방 전문가들은 여러차례
경고 발언을 해왔다.

현재로서는 서방의 경제원조가 본래 의도와는 다른 목적으로 유용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러시아가 서방의 원조자금을 무기개발 및 생산
프로젝트에 사용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것이 사실일 경우 세계로서는 정말 큰 일이다.

러시아의 지배층 엘리트들은 서방의 경제원조뿐 아니라 러시아의 공공자산에
대한 횡령에도 깊숙이 개입돼 있다.

서방세계의 러시아 추종자들은 이를 "사유화"라는 말로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유화 과정에 걸려있는 돈은 수십억달러나 된다.

이 "사유화"가 그릇된 길로 들어서면 그 결과는 치명적이다.

가장 비극적인 결과는 러시아국민들의 도덕성 마비다.

1억7천여만명의 러시아국민들은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도둑질과 부정
축재의 동의어로 생각하게 된다.

이는 러시아의 경제개혁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애물이다.

따라서 다음의 두 가지 문제는 명확히 규명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폭탄의 뇌관으로 남아 언제 어디서 폭발해 위기를 초래할지
알 수 없다.

첫째, 바깥 세계의 누가 러시아 지배 엘리트에게 국제 금융거래의 비밀과
기법을 전수해 주었느냐는 점이다.

불과 몇년전만 해도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러시아 공무원들이-비록
지금은 억만장자들이지만-서방의 금융전문가들의 도움없이 금융시장에서
그러한 기술을 습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러시아 고객들이 숙련된 솜씨로 검은돈을 세탁할
수가 없다.

결국 서방의 금융전문가들이 러시아 관리와 마피아단의 해외지원금 횡령 및
돈세탁에 깊숙이 관여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돈세탁 금액이 1백억달러나 되는 거액임을 감안할 때 자금의 수령자가
모스크바-텔아비브-브루클린으로 이어지는 삼각지대 출신의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두번째 의문도 이와 관련돼 있다.

서방의 정치세력-특히 미국-이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는지는 분명치 않다.

미국 언론들은 미국의 일부 유력 정치인들과 러시아 마피아들이 함께 있는
사진을 최근 보도했다.

이 사진은 이들 사이에 뭔가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강력히 보여준다.

이러한 모든 정황들로 볼 때 러시아로부터 불법 유입된 거액의 지하자금에는
미국 정치인들이 깊숙이 개입돼 있다고 봐도 무방할 듯싶다.

러시아의 금융스캔들은 러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서방의 대 러시아 정책과 떼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미국 정부를 중심으로 서방세계는 진실을 반드시 규명해야 한다.

< 정리=김재창 기자 charm@ >

-----------------------------------------------------------------------

<>이 글은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린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의 기고문이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9월 17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