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바위.보" 놀이를 살펴보자.
한 손으로 가위.바위.보자기의 세 가지 모양을 만들어 승부나 순서를 정하는
놀이가 아닌가.
이는 본래 중국에서 유래돼 전세계에 퍼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대 인간사회에서는 평생을 승부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
긴장감이 감돌 수밖에 없는 생활의 연속이다.
이 속에서 가위.바위.보와 같은 승부 결정방식에 대해 음미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놀이 속에 오묘한 철리가 배어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가위.바위.보"는 여유와 운치가 있는 승부결정방식이다.
승부를 정하기 위해서는 승과 패, 또는 OX처럼 두 가지 경우만 상정해도
되지만 여기서는 세 가지 경우를 상정하고 있다.
양단간에 승과 패를 결정하지 않고 승과 패, 그리고 비김을 허용하고 있다.
승부에 참여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두 가지 선택이 아니라 세 가지 선택이
있어 훨씬 여유가 있다.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알게 모르게 조급증에 걸려 있다.
우리 사회의 각 분야에서 흑백논리가 판을 치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조급증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오직 승과 패만 있지 양자가 공존할 수 있는 비김 따위는
허용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보면 승과 패,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비김까지 허용하고 있는
"가위.바위.보" 게임은 단칼에 승부를 내는 것보다 훨씬 운치가 있어 보인다.
갈수록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형태의 싸움을 보다가 이런
싸움도 있구나 생각하면 승부결정이 오히려 낭만적이라고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든 여유로움을 느끼는,그래서 기분이 조금은 상쾌한 감을 준다.
둘째, "가위.바위.보"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점을 가르쳐주고
있다.
가위가 보자기를 쉽게 자를 수 있어도 바위가 내려치면 부러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힘센 바위도 넓은 보자기가 감싸 안으면 달리 방법이 없게
된다.
이처럼 ''가위.바위.보''의 세계에선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
이기다가도 지고 지다가도 이긴다.
항상 이길 수도 없고 항상 지지도 않는다.
확률적으로 보면 이기거나 질 확률은 반반이다.
이 얼마나 맛깔나는 경쟁의 원리요, 부질없는 인간에 대한 멋있는 가르침
인가.
따라서 이겼다고 우쭐댈 필요도 없고 졌다고 기분 나빠할 필요도 없다.
승부는 언제든지 뒤바뀔 수 있으니까.
역사를 살펴보면 승자가 패자가 되고, 패자가 승자로 뒤바뀌는 예는 수없이
많다.
한때는 세계를 영원히 지배할 것만 같았던 제국들이 몰락하여 이제는
국제사회에서 별로 영향력이 없는 국가로 전락해 버린 경우가 적지 않다.
로마제국의 영화가 오도아케르가 이끄는 게르만 용병들에게 하루아침에
허물어질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광활한 대초원을 말로 달리며 끝없이 정복지를 넓히던 칭키즈칸이 몽골의
오늘날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오스만터키도 화려한 역사로 역사책을 장식한 나라 아닌가.
반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미국과 러시아는
19세기초까지만 해도 잊혀져 있던 땅에 불과했다.
따라서 "가위.바위.보"가 주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가르침은
순간의 승부에 집착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더욱 심오하고 엄숙한 가르침으로
파고들고 있다.
셋째, "가위.바위.보" 어느 것도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전략을 미리 알아내고 거기에 맞추어 나의 전략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어떤 사람이 주로 가위를 낸다고 하자.
이것을 아는 상대방은 바위로 금방 제압하게 된다.
따라서 우선 내 전략을 감추어야 하지만 동시에 상대방의 전략을 알아내어
거기에 맞게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끊임없이 변화와 개혁을 추구해야 한다.
내 것이라고 해서 남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고수만 할 일이 아니다.
오래된 것을 계속 고쳐나가고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승자가 될 수 없다.
이것은 곧 갈수록 치열해지는 생존경쟁에서 이기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한한 자기연마를 토대로 한 변화와 개혁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가위.바위.보"가 인간에게 주는 가르침은 자못 크다.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값진 유물이 비단 유형의 형태로만 있는 게 아니라
이처럼 무형의 형태로도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옛날 사람들의 번뜩이는 지혜와 심오한 가르침에 머리가 숙여진다.
새삼 온고이지신을 되새겨 본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6월 1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