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학문 상임부회장 ]

수출산업촉진위원회가 정부로부터 구로동 수출산업단지를 설립하겠다는
확약을 받아낸 뒤 나는 다소 여유를 갖고 싶었다.

또 한국경제인협회의 진로에 대해서도 곰곰이 생각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국내사정, 특히 여야대치 정국은 이런 여유를 주지 않았다.

당시 내가 생각했던 경제단체의 정체성은 이런 것이었다.

어떤 정국에서라도 민간 경제계만은 국가와 사회를 안정시킬 큰 "닻"역할을
해야 한다.

또 어려울수록 국민에게 뚜렷한 목표와 희망을 주는 집단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런 준비는 착착 진행해 왔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63년 벽두 이 나라 최초의 민간 두뇌집단인 "경제.기술조사센터(현 한국경제
연구원)"를 발족시킨 것이 그랬다.

수출산업촉진위원회를 발족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목표와 희망을 줄 수 있는 조직을 만드는 것은 경제단체의 의무라고 나는
여겼다.

그 당시도 우리가 준비만 제대로 하면 산업을 일으키고 국익을 증진시킬
수 있는 기회는 많다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수출산업촉진위 발족문에 나는 이 생각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 나라 수출산업촉진을 위한 시리와 지리는 이미 갖추어져 있다. 이에
예지와 협동을 가미하여 결실을 기할 따름이다"

63년 봄 경제인협회가 낸 월간지 "경협" (제4호)에는 "바가지를 들어라"라는
제목으로 이런 뜻을 표현해 봤다.

"선진국은 물론 일본마저 노임의 급등으로 노동집약적 제품을 생산할 수
없으므로 우리 한국은 하루빨리 이를 받아들일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마치
시골에서 분봉할 때 벌떼 받을 바가지를 높이 드는 모양으로..."

지금 젊은 세대들은 왜 벌떼가 날아드는데 바가지가 필요한지 잘 모를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 바가지를 장대에 매달아 분가하는 여왕벌을 유인하는
풍경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선진국과 일본이 더 이상 감당 못하는 노동집약적 산업을 빨리 받아 우리
경제를 키워 보자고 나는 주장한 것이다.

이 "바가지를 들어라"라는 이색 제목은 당시 인쇄매체에 자주 인용되면서
유행어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어쨌든 62년10월 취임한 이후 반년은 이렇게 바쁜 일정으로 후딱 지나갔다.

그 와중에서 이제까지 설명한 대로 경제인협회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어느 조직이나 개인 성향에 따라 정치성을 띤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경제인협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경제인협회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자 협회를 이용해 자신들의 목적을
채우고 싶어했다.

나는 원래 고지식한 편이어서 이들과는 잘 맞지 않았다.

63년7월2일 이들은 경제인협회 초대 상임부회장으로 진학문씨를 영입했다.

영입목적은 사무국장인 나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진 부회장 본인이 취임 한달이 안돼 나와
윤태엽 총무부장(후에 전경련 상임부회장 역임)에게 말했기 때문이다.

이한원 심상준씨 등은 진학문씨에게 수차례 경제인협회 부회장을 맡아달라고
해도 고사하자 "정책 문제는 김 사무국장에게 맡기고 도장만 관리하시면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부회장을 맡아 3년을 채우지 못했으나 진 부회장은 내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이었다.

그는 3.1독립선언문을 쓴 육당 최남선 선생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21년
"시대일보"를 같이 발간한 분이기도 하다.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눈 일이 기억난다.

만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차를 마시며 내가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왜 일본에 강점당했습니까"

참 실례에 가까운 당돌한 질문이었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백지에 달필로 글을 썼다.

"대하장경에 일목난지라"

"나라"라는 큰 집이 무너졌는데 기둥 하나로 지탱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진 선생은 자기 자서전에도 없는 이야기를 나에게 종종 해주었다.

그는 21년 러시아문학을 공부하러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잠깐 머무른 적이 있다.

하루는 시내를 걷는데 뒤에서 마차 달려오는 소리와 함께 아녀자들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돌아보니 러시아 기병이 긴 말회초리로 한인교포를 마구 후려갈긴다.

이들이 보따리를 흘리자 러시아 병정들은 주워 싣고 쏜살같이 달아났다.

이것이 당시 러시아 사회주의 붉은 군대의 작태였다.

"형제애와 평등을 내걸고 10월혁명을 했다는 나라가 이 모양이니 내가 거기
가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그 길로 모스크바 유학을 단념했다고 한다.

진 선생은 또 신익희 선생과 일본 와세다대학 동창으로서 필생의 지우였다.

신 선생은 56년 이승만대통령에 맞서 대통령선거 출마를 결심했을 때도
진선생과 상의했다.

그때 진 선생은 "이승만 정권은 어떻게 해서든지 정적을 죽여버린다"며
출마를 말렸었다.

진선생은 우리나라 브라질이민의 제1호이기도 하다.

외동딸이 다니던 학교앞에 문방구를 차렸는데 뒤늦게 생긴 문방구들이 학교
선생들을 매수하는 것을 보고 "이런 부정이 난무하는 나라에서 아이를 교육
시킬 수 없다"고 브라질 이민을 결심했다고 나에게 털어놓았다.

내 그릇이 작아서 같이 일할 때 진 선생의 고매한 경륜을 좀 더 배우지
못한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다.

< 전 전경련 상임고문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5월 3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