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가 노래의 꽃이라면 작곡가 작사가는 노래의 뿌리다.

정작 꽃을 피워내는 것은 뿌리지만 사람들은 가수나 노래는 기억해도
작곡가 작사가는 곧 잊고 만다.

도쿄제국음악학교에 유학중이던 손목인(본명 손득열)이 방학중 귀국했다고
OK레코드사 이철 사장에서 발탁된 것은 교회의 피아노 연주회에서 였다.

OK의 전속작곡가가 된 그는 34년 신인가수 고복수에게 "이원애곡"
"타향살이"를 작곡해 주어 고복수를 스타덤에 올려놓고 이듬해인 35년에는
"목포의 눈물"을 작곡해 이난영을 가요계의 여왕으로 만들었다.

목포청년 문일석의 애향시에 붙인 곡이다.

이 두곡의 노래는 지금까지 60여년동안 우리가 즐겨부르는 노래다.

데뷔와 함께 인기작곡가가 된 그는 학교를 옮겨 일본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36년 귀곡해 OK전속의 CMC밴드를 조선최초의 스윙밴드로 키워냈다.

그가 이 밴드를 이끌고 고복수 이난영 김정구 남인수 등과 동경공연을 했을
때 일본신문들은 "일본 예능계의 진로를 재검토하라"는 기사를 썼을 정도로
명성을 떨쳤다.

해방뒤 HLKA방송의 음악담당자로 일하던 그는 6.25때 부산에서 일본으로
밀항한다.

6년간의 밀항생활은 남의 눈을 피해야하는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일본서
그는 "카스바의 여자" "하와이의 밤" 등 대 히트곡을 작곡했다.

57년 귀국후 영화음악에 손을 대는 한편 64년 한국음악저작권협회를 조직해
저작권개념조차 모르던 레코드음악계 개혁에 앞장섰다.

그러나 67년에 미국으로 이민한 이후 14년동안의 떠돌이 미국생활은 그에게
큰실망을 안긴채 끝났다.

귀국해 80이 넘어서도 "위험한 여자" "타국살이" 등을 발표한 열정파였다.

1천여편의 가요, 50편의 뮤지컬, 10편의 영화음악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기고 손목인이 일본에서 세상을 떠났다.

5살에 고향 진주를 떠난뒤 80여년을 "타향살이" 끝에 타향에서 생을 마감
하고 말았다.

자주 왜색가요시비에 휘말렸던 그가 생전에 한말이 있다.

"한자문화권에 뿌리를 갖고 있는 한.중.일의 음악은 서정의 기본적 가락이
같을 수 밖에 없다"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12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