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고향으로 간 "휴먼 드라마"가
워싱턴에서도 화제다.

미국 언론들은 정 명예회장의 과거경력과 성장배경까지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정 명예회장과 소떼를 한데 묶어 바라보는 미국인들은 "보기드물게
목가적이며 향수에 젖게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라는 반응들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북한을 개방으로 끌어내기 위한 "소떼 작전(Operation
Rawhide)"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에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흥미와 잔잔한 감동 속에서도 미국인들이 한국에 대해 갖는
궁극적인 의문은 한결같다.

"한국의 경제위기가 언제쯤 끝날 것인가"하는 점이다.

한국경제는 아시아 경제의 단면이고 미국경제는 아시아경제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워싱턴의 국제경제연구소(IIE)를 이끌고 있는 프레드 버그스텐 소장이
그의 연구진들을 모아 이에 관해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많은 연구진들은 한국경제가 위기를 탈출하는데 2~3년이 걸릴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버그스텐 소장과 몇몇 연구진의 견해는 달랐다.

10년이 걸릴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매우 회의적인 입장이다.

비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분석은 간단하다.

한국위기의 진원지를 빚에서 찾고 있다.

한국정부는 외채가 1천5백60억달러 정도라고 발표하고 있지만 이를
액면대로 믿는 외국인은 별로 없다.

이것 저것 숨겨놓은 것까지 합치면 2천억달러를 넘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한국 외채의 이자는 평균 연10% 정도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국가부도가 나지 않으려면 최소한 1년에 2백억달러를 벌어들여야 한다는
산술적계산이 나온다.

적어도 이자는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수출만 늘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남는 돈이 2백억달러여야 한다.

하지만 요즘 같은 무한경쟁 시대에 남는 장사가 그리 쉽지 않다.

미국 길거리에 간간히 보이던 한국자동차를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백화점에서도 중국제는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한국상품은 가물에 콩나기다.

원금까지 계산하면 갈 길은 더욱 아득하다.

매년 원금을 1백억달러 씩이라도 갚자면 우리가 순수하게 벌어들여야 하는
돈(이익)은 자그만치 연간 3백억달러가 돼야한다.

이렇게해도 2천억달러를 다 갚는데 20년이 걸린다.

절반만 갚아도 10년이다.

물론 지구상에 빚 하나 없이 사는 나라는 없다.

따라서 5백억달러만 제대로 갚는다 하더라도 외국 투자자들의 신뢰는
회복될 수 있고 그렇게 해서 나라경제가 제 궤도에 올라 설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2~3년, 또는 5년이면 회복될 수 있다는 주장은 이런 산술에서 나온 견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신뢰문제만 해결된다면 2천억달러를 그대로 끌고 갈
수도 있다.

외국인들이 믿고 "빚을 그대로 써도 좋다"만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낙관적이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얽히고 얽힌 노사문제, 지지부진하고 빈 목소리뿐인 개혁, 자기희생은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비경제적 고집 등 여러가지 정황이 외국인들의 신뢰를
얻어내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홍구 주미대사가 기자들과의 한 간담회에서 "우리는 "외환위기"에 처한
것이 아니라 "신뢰위기(confidence crisis)"에 빠져 있으며 김대통령의
미국방문은 바로 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말한 대목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 워싱턴=양봉진 특파원 bjnyang@aol.com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8년 6월 19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