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적거리고 있었다.
한국전쟁사료를 찾기 위해서였다.
모두 8천여장을 골라내 복사했다.
귀국후 8권짜리로 곧바로 출판했다.
역사학계의 고질적인 병폐로 남아있는 "자료혼자만 보기"가 싫어서였다.
이렇게 모아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한국전쟁관련 자료규모는 국내에서
다섯손가락안에 들 정도라고 한다.
자료혼자보기를 극복하기 위해 현재 "한국국가기록재단" 창립도 준비중이다.
신교수는 기존의 정치사학에 과감히 도전하는 인물로도 정평나 있다.
그의 이런 비판성과 도전성은 집념으로 이어진다.
30년간에 걸친 각고끝에 전봉준평전을 지난해 발간했다.
그가 밝히는 앞으로의 목표는 둘이다.
하나는 학문보다는 인생을 가르쳐 주는 학자로 평가받고 싶다는 것.
또 하나는 학자는 논문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제자로서 말한다는 것이다.
스물여덟에 강단에 서보니 절반이상이 연배였고 학생들의 담배피우기는
물론 건네는 말에 마음이 상해 이후 강의실밖에서 학생들 만나기를 꺼렸다.
그러나 4~5년전 입학생의 아버지가 자신보다 나이가 젊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한시대가 가고 있음을 문득 깨닫고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래서인지 신교수 자신도 존경하는 스승을 스스럼없이 꼽았다.
대학시절의 조재관 건국대교수와 석사학위지도교수였던 고려대의 김영두
교수.
조재관교수에게서는 인생과 학문연구의 치열성을 배웠다고 한다.
촛불에 지진 면도날로 허벅지를 베어가며 연구하던 조재관교수를 잊을수
없다고 한다.
신문지로 바른 사과궤짝을 책상으로 사용했던 김영두 교수로부터는 학자의
청빈성을 깨우쳤다고 한다.
< 김홍열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0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