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 햇살에 조금 목이 탄 김현정(22)양.

마실거리를 사러 24시간 편의점에 들어선다.

냉장고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그녀의 눈에 게토레이 코카콜라 등 몇몇
고전들이 스쳐가지만 그녀는 별다른 동요가 없다.

그런 그녀가 한참만에 "어" 소리와 함께 집어든 것은 "앵두가 유자를
만났을 때"라는 캔음료.

이리저리 잠시 살펴본뒤 곧 값을 치르고 가게 문을 나선다.

그녀가 이 음료를 고른 것은 독특한 이름 때문이다.

다른 젊은이들도 십중팔구 이처럼 톡톡튀는 이름의 음료를 선택한다.

"사각사각"이나 "갈아만든"으로 시작하는 음료가 인기를 끌었던 것도
따지고보면 센스있는 상표명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른바 오렌지족의 거리로 알려진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의 레스토랑
라인클럽.

이곳은 독특한 음식이름으로 신세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메뉴판 가득 온통 재치넘치는 음식이름들이다.

"노란 셔츠 입은 생선"을 가르켰더니 고등어튀김에 달걀을 입힌
요리란다.

"조로의 번개검법"은 살짝 익힌 쇠고기 요리.

영화이름에서 따왔음이 분명한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돼지"와 "우물에
빠진 돼지"는 각각 튀긴 돼지고기와 돼지고기 장조림.

해물 샐러드는 "인어공주와 아이들"로 이름붙였다.

신세대들은 옷을 고르는데 눈뿐만 아니라 귀도 사용한다.

요즘 뜨고 있는 패션 브랜드는 옴스크(OMSK) 지이디(GED) 이엔씨(EnC)
온앤온(ON&ON) 비키(VIKI)등이다.

또 무크(MOOK)와 놈(NOM) 닉스(NIX)등도 아성을 지키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거칠고 강한 이름이다.

X Y K 등 알파벳 가운데서도 아주 거친음들을 많이 사용해서이다.

신세대들의 필수품으로 불리는 무선호출기(삐삐) 이름도 같은 식이다.

닉소(NIXXO) 싱(XING) 뚜띠(TUTTI) 타키온(TAKION)등 거친 소리들이
히트를 치고 있다.

이런 이름들은 대부분 영문자를 나열한 것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발음이 짧고 거친데다 외국브랜드 같은 느낌을 줘 이런 브랜드를
고른다고 신세대들은 말한다.

늘 남다르려하는 이들 세대에겐 강한 것이 인상에 남기 때문인가.

신세대들은 영화도 개성있는 제목의 것을 찾는다.

최근 히트를 친 국산영화로 "초록물고기" "박대박" "어른들은 청어를
굽는다"등 제목만으로 무슨 내용인지 알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울릉도엔 극장이 없다"등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장난스럽고 개성있는 이름으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영화에 신세대
관객이 몰리는 것을 감안한 이름짓기이다.

"미스터 콘돔" "코르셋" "쁘아종"등 대신할 우리말이 있는 데도 굳이
영어를 쓴 제목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책 제목은 신세대들의 이름 선택의 다른 면을 보여준다.

적어도 책에 있어선 상징적이고 깊은 뜻을 담은 이름은 더이상 인기를
누리지 못한다.

우선 서구적이거나 낯선 이름을 찾는다.

보지않은 것에 대한 동경 때문일까.

재즈, 바그다드 카페, 오렌지, 마요네즈등 최근 베스트셀러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또 책내용을 길게 풀어쓴 제목의 책도 많이 팔린다.

"마음을 열어주는 백한가지 이야기"."20대에 하지 않으면 안될 50가지"
등이 그것이다.

"한국이 죽어도 일본을 못따라잡는 열여덟가지 이유"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긴 이름이다.

< 김용준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9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