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훈 <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 >

한 나라의 지도자는 긴 안목을 갖고 국가전략을 올바르게 성찰해가야 한다.

1945년 7월 독일 포츠담에서 미국의 트루먼, 소련의 스탈린, 영국의
애틀리가 모여 전후 독일 처리문제를 논의했다.

불행하게도 애틀리와 트루먼은 정상의 자리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국제
정세에 관한 식견과 지도력이 스탈린에 비해 부족했다.

따라서 독일을 포함한 전후의 모든 문제는 스탈린의 각본대로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 결정된 것이 동서독 분단이고, 베를린을 3등분하는 일이었다.

스탈린은 포츠담회의에서 그야말로 막강한 텃세를 발휘했다.

5개월전 얄타회담에 참석했던 처칠과 루스벨트가 없는 3자회담은 스탈린의
독무대였다.

이때부터 소련은 유럽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공산화할 전략을 수립하게
됐다.

이른바 코메콘을 조직하고 국제공산당을 설립해 약소국들을 대상으로 힘을
과시하게 된다.

아프리카는 물론 쿠바를 거점으로 한 중남미 전역을 공산주의 물결속에
파묻히게 한다.

그러나 53년 스탈린이 죽고 소련은 몇 사람의 권력투쟁을 거쳐 56년
흐루시초프 손에 넘어간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집권때 그 악명높은 KGB 국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공산주의 세계화전략을 수립한 장본인이다.

그가 소련의 1인자에 오르자 전세계가 국제공산주의 세력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공산주의 세력의 황금시대에 군인출신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세계정세에 대처하는 전략이 미흡했다.

미국은 60년 쇠퇴해가는 미국의 국력을 회복하고자 케네디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자 흐루시초프는 케네디의 기세를 한꺼번에 꺾기
위해 이른바 제2차 "베를린봉쇄"조치를 발표한다.

2백만 베를린시민을 담보로 미국과 맞붙게 된다.

대통령에 당선된지 얼마되지 않았던 케네디는 위기를 맞게 됐다.

백악관의 수많은 참모들과 숙의를 거듭했으나 좋은 대안이 없었다.

이때 케네디가 단독으로 구상한 전략이 이른바 베를린수호작전이었다.

케네디는 직접 전용기를 타고 서베를린에 날아간다.

그리고 브란덴부르크에서 "이히 빈 아인 베를리나(나는 베를린 시민이다)"
라는 유명한 연설로 전 유럽인들에게 미국의 결의를 전하게 된다.

이 한마디로 자유를 찾아 생사를 걸고 서독으로 탈출하는 동독 피난민들이
줄을 이었다.

이때부터 소련은 동독주민들의 집단탈출을 막기 위해 베를린 한복판에
65km에 달하는 장벽을 쌓게 된다.

만일 이때 서베를린마저 소련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면 유럽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케네디가 맞은 두번째 역사적 위기는 쿠바로 향하는 소련의 미사일 수송
이었다.

1961년 가을, 소련은 쿠바를 중남미 공산화의 거점으로 부상시키기 위해
대륙간 미사일을 가득 실은 구축함대를 쿠바로 파견한다.

미-소 양국은 2차대전후 최대격전의 순간을 맞게 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소련은 5백60기의 장거리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고
미국은 2백80기에 불과했으므로 미사일전쟁이 일어나면 30분 이내에 미국
시민 3분의1, 소련인민 5분의1이 죽게 될 것이란 세기적 운명이 눈앞에 닥친
것이다.

그러나 케네디는 미국시민 3분의1의 죽음을 담보로 국가운명을 건 이
엄청난 모험에 단호하게 대처했다.

그리고 전 미국인들에게 자유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대통령과 같이 죽자고
호소했다.

전쟁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됐고 전세계인이 이를 지켜봤다.

드디어 미합중국 대통령의 위대한 결단력 앞에 흐루시초프는 굴복했다.

이 두가지 사건은 20세기를 마감하는 오늘날 세계의 국제정치학자들이
자유세계를 위해 가장 위대한 결단력이 발휘된 사건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일은 차기대통령 선거를 앞에 놓고 있는 우리에게 지도자의 역량이
무엇인가에 대해 새롭게 비춰주고 있다.

국가경쟁력이 총체적으로 무너지고 내일을 바라보는 국민의 주인의식이
탈색돼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내일을 열어가는 민족사의 갈림길에서 위대한 지도자의
올바른 통찰력과 결단이 거듭 아쉬워질 따름이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