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분기께부터 들먹이기 시작한 경제위기의식이 최근에 더욱
확산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반기 들어 상품수출이 감소세를 나타낸 반면 경상수지의 적자폭과
대외부채규모는 급증 추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주식시장도 추락장세를 나타내 우리경제에 대한 위기감이
증폭되고 있다.

이러한 위기의식의 저변에는 올해들어 급격히 악화된 기업경영사정(경기적
측면)과 정책패러다임의 변혁이 없는한 기업경영환경이 가까운 장래에
개선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기대상실감(구조적 제도적 측면)이 복합적으로
깔려있다.

올해의 체감성장률(교역조건 악화를 감안한 수정된 GDP 성장률)이 작년의
8.2%에서 4.2%(실질 GDP성장률은 9.0%에서 6.8%)로 크게 낮아졌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우리기업의 경영사정이 급속히 악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올해의 경제성장률이 우리경제의 잠재성장률 수준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는 시각은 교역조건의 악화를 고려하지 않은 단견으로서 수정돼야 할
것이다.

통상적인 의미의 경기하강이 내년 상반기중 저점에 이를것으로 전망되고
있고 내년의 교역조건악화도 올해보다 크게 낮아질것으로 예상돼 기업의
체감경기는 내년 하반기부터 개선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경영환경 개선조치가 가시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우리경제에 대한 위기의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정책운용방향도 기업경영환경의 개선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우리기업의 국제경쟁력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여러차례
되풀이돼왔지만 이를 위한 기업경영환경이 오히려 불안해지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사회에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확립돼 있지 않다.

세계화시대가 곧 경제적 무한경쟁시대를 의미하며 이 시대에 가장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체제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라는 인식이
우리사회에서는 아직도 보편와 돼있지 않다는 얘기다.

동서냉전시대에 사회주의적 요소를 많이 도입했던 대부분의 유럽
선진제국도 90년대 들어서부터 사회복지제도의 재검토, 노동시장의 탄력성
회복, 정부규제의 과감한 철폐등을 통하여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재구축하고자 힘쓰고 있다.

냉전시대에 구축됐던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체제에서 탈피하고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분수에 넘는 복지제도와 잦은 노사분규, 국유기업과 정부규제의 확산
등으로 경제가 동맥경화증에 시달리게 됐기 때문에 이를 시급히 치유하지
않고서는 고비용 구조에 따른 기업경영의 애로와 이로인한 높은 실업률 및
재정적자문제를 해소할 수 없다는 유럽제국의 역사적인 경험을 되새겨
우리의 국정운영방향을 올바로 찾아야 할 것이다.

둘째 우리의 국민의식이 세계화시대에 걸맞게 바뀌어져야 할 것이다.

감성적 배타적 폐쇄적인 국민정서가 이성적 포용적 개방적으로 전환돼야
할 것이다.

지연이나 혈연 학연 등에 집착한 배타적이고 감성적인 국민정서하에서는
집단이기주의적인 제도와 관행을 개혁하기 어렵고 따라서 합리적인 시장경제
질서를 정립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외국인 기업이 우리나라에 투자하기를 꺼리고 있는 요인중의 하나가
우리 국민정서의 배타성에 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될 점이다.

셋째 정부시책이 대기업그룹의 소유분산과 경제력집중 억제라는
명분에 너무 얽매여 있어 정책의 역동성이 상실되고 대기업의 경영활동을
크게 위축시켜 왔다.

그동안 떠들썩하게 강조돼온 정부규제 완화문제, 공기업의 민영화문제,
금융기관의 경영혁신과 국제경쟁력 강화문제 등이 실효성있게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큰 이유가 이와 관련돼 있다.

소유분산과 경제력집중 억제문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장점을
크게 변질시키지 않는 방향에서 점진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과제들이다.

또한 잘못된 대기업의 경영관행은 잘못된 정치관행 행정관행 금융관행
세무관행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릇된 기업의 경영관행을 고치는 문제는 기업활동을 위축시키는
방향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범사회적인 개혁차원에서 타부문과 연계하여
체계적으로 추진되어야 부작용을 줄이고 실효성을 확보할수 있는 문제이다.

개방체제하에서 외국기업과 싸울 능력이 있는 대기업의 경영활동을
업종이나 자금조달면에서 차별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사실상 시대착오적
이다.

왜냐하면 대기업의 규제로 발생되는 공백이 국내 중소기업으로 채워지기
보다는 외국기업이나 수입상품으로 메워질 가능성이 클뿐아니라 국내산업의
공동화를 촉진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정부시책의 신뢰성과 일관성문제도 기업경영을 불안하게 하는
요인이다.

여러 정책목표간의 상충문제를 사전에 충분히 조율하지 않거나 세계화
시대에 걸맞지 않은 정책및 지역 또는 집단이기주의에 편승하는 정책등은
부작용이 많고 단명하게 마련이다.

"고비용-저효율구조"를 타파하는 것이 시급히 해결해야할 정책과제라면
정책당국은 정치적 국민정서에 연연하지 말고 시장경제질서를 경직화시키고
있는 각종제도와 관행을 과감하게 개혁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에 흔히 강조되었던 "한국적"묘안을 찾느라고
고민하는 것보다 80년대이후의 영국이나 뉴질랜드의 경험을 적극 원용하기
바란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