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기때 뒤로 물러난다는게 여간한 용기가 아니다.

그것도 임기가 한참 남은 은행장이 후진들에게 길을 터주기위해 자리를
내주는건 말그대로 ''깜짝 놀랄 일''이다.

신선한 충격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은행장에겐 이례적으로 훈장(은탑산업훈장)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세간의 찬사를 받았던 홍희흠 전 대구은행장은 이제 한발짝 뒤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은 대구은행회장(비상임)겸 대은금융경제연구소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한걸음 뒤에 있지만 요즘이 더 바빠 보였다.

금융혁신 기법을 후진에게 전수하는 일도 그렇지만 물러난 유능한
경영자를 세상이 가만히 놔두지 않는 것 같았다.

"차와 독서로 소일한다"며 말을 아끼려하는 그를 만나봤다.

[ 대담 = 정만호 경제부장 ]

=====================================================================

-대구은행장직을 그만두신 것도 벌써 9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 홍회장 =음악도 듣고 국산차도 마시고 책도 보며 지냅니다.

지방자치단체나 대학 등에서 특강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주례도 서고 전시회도 갑니다.

마음에 여유가 있어 생활은 아주 좋은 편입니다.

-특강은 주로 어떤 내용인지요.

<> 홍회장 =그저 주최측에서 요구하는데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경영혁신경험이나 지방화시대 지방의 역할 등이 주류를
이루죠.

지난달엔 경북대학교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에서 "21세기를 대비한
바람직한 경영자상"이란 주제로 강연을 했습니다.

-지난 2월 임기를 2년이나 남겨놓고 갑작스럽게 용퇴하셨는데요.

어떻게하면 임기를 연장해볼까하는 관행이 주류를 이루는 금융계 풍토에
비춰볼때 상당히 이례적이고 참신한 결단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만두시면서 후진양성과 건강을 위해 용퇴한다고 발표하셨는데요.

용퇴하신 진짜 이유가 무엇입니까.

<> 홍회장 =말그대로 입니다.

지난 2월 주총때 대구은행에선 5명의 임원이 임기를 맞았습니다.

제가 더 하고자 하면 능력있는 후배들이 물러나야할 판이었지요.

또 건강도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용퇴결정을 내렸죠.

물론 선배은행장들의 퇴임과정이 아름답지 않아 임기를 앞두고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후배들로부터 "저런 사람도 있구나"는 말을 들어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당시 정치에 참여한다는 말도 있었는데요.

<> 홍회장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지금 생활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건강은 많이 좋아지셨습니까.

<> 홍회장 =아주 좋아졌습니다.

시간나는데로 등산도 하고 골프도 칩니다.

마음이 편한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막상 현직에서 물러나보니 심신이 이렇게 좋은데 왜 그렇게 자리에
연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구은행회장겸 대은금융경제연구소회장으로 재임하고 계시는데요.

회장에 취임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 홍회장 =은행장재임중 미국이나 일본을 돌아보며 은행회장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나름대로의 경험을 은행과 사회에 보탬이 되도록 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회장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론 은행일에 거의 관여하지 않습니다.

조직에 시어머니가 둘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대구은행장으로 부임하신 지난92년 6월엔 대구은행이 내부갈등 등
여러가지로 어려웠던 상황이었습니다.

단시일내에 잡음을 극복하고 대구은행을 우량은행으로 키워내신 비결을
공개해주시지요.

<> 홍회장 =뭐 비결이 따로 있습니까.

그저 사심없이 열심히 했고 직원들이 이에 공감, 열심히 해준 덕분이지요.

굳이 비결을 꼽으라면 조직과 구성원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가지는
"인간존중 경영"이 실효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존중 경영이란 말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함축돼 있는 것으로
들립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지요.

<> 홍회장 =형이상학적으로 들리겠지만 경영자는 조식의 목표달성이나
자신의 성취욕구를 충족하기에 앞서 근본적으로 조직과 구성원에 대한
사랑이 절실히 필요하다는게 제 경험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직의 단결을 유도해내지도 못할 뿐더러 지속되지도
못합니다.

"경영"이란 말자체가 "철학"과 "돈벌이"의 합성어 아닙니까.

그런데도 최근 경영자들은 돈벌이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게 사실입니다.

경영자들은 좀 더 긴 안목과 철학을 갖고 조직을 꾸려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은행장들도 마찬가지고요.

-부임하시자마자 구두 한켤레씩을 전직원에게 선물하신 것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 홍회장 =그런 거창한 철학은 없었습니다.

경영혁신을 해야겠는데 수단이 마땅치 않더라구요.

그래서 생각해낸게 구두였어요.

구두는 "가죽신" 아닙니까.

가죽의 한자어는 혁이고요.

다시 말해 구두가 혁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판단, 그렇게 했습니다.

-단지 그 이유뿐이었습니까.

<> 홍회장 =몇가지 다른 이유가 있었죠.

첫번째는 직원들에게 경영혁신을 하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점을
인식시키고 싶었습니다.

구두 한켤레라도 돌아오는걸 보니 혁신이 괜찮은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갖기를 바랐죠.

또 가죽같이 경영혁신을 오래 추진하자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말로만 하지말고 발로 뛰자는 내용도 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영혁신은 어땠습니까.

재임기간중 경영혁신을 스스로 평가해주시지요.

<> 홍회장 =상당히 성공적이었다고 자부합니다.

직원들이 스스로 참여하는 기업문화가 형성돼 가시적인 성과도
상당했습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현금카드 즉석발급시스템을 개발하고 입금전표를
없앤 것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이런 성과보다는 전 구성원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데다 제가
물러난 뒤에도 경영혁신이 꾸준히 추진되고 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현직에서 떠나 있으면 조직이나 사물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마련일텐데요.

국내은행산업을 평가하면 어떻습니까.

<> 홍회장 =일반기업체보다 여러가지로 어려운 점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업은 스스로 개척하는 자세로 살아온 반면 은행은 상당히 정부에
의존하고 따라가는 성향이 강했습니다.

이번 금리인하 과정만 보면 알 수 있잖습니까.

문제는 이런 타성을 어떻게 극복하는 것이냐인데 자율과 개방 등이
한꺼번에 닥치다보니 은행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하나 순리대로 해결해 나가야지 성급히 서두르면 안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정부에서 비상임이사회제도 도입을 골자로한 책임경영체제 구축방안을
마련했는데요.

책임경영체제는 어떻게 구축될 수 있겠습니까.

<> 홍회장 =주주권을 보호하는 한편 책임경영체제를 구축하는 고심끝에
나온 결론으로 생각됩니다.

중요한건 제도가 아니라 최고경영자의 자세입니다.

최고경영자인 은행장은 임기에 연연하면 안됩니다.

임기개념에서 벗어나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제도는 잘하는 은행장은 더 잘할 수 있도록 밀어주고 못하는 은행장은
중도퇴진시킬 수 있는 선에서 그쳐야 합니다.

-은행산업의 경쟁력강화차원에서 은행간 합병의 필요성이 시급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일부 지방은행 등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인데요.

어떻게 보시는지요.

<> 홍회장 =은행간 합병은 시급하다고 봅니다.

국내 시중은행이 일본의 지방은행보다 규모가 작습니다.

기업들의 덩치가 커지다보니 기업들의 요구에 은행이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도 빚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소규모 은행이나 지방은행 2개를 합치는 것보단 대형 시중은행을
합치는게 낫다고 봅니다.

그것도 2개가 아닌 3-4개를 합쳐야 합니다.

그러면 합병에 따른 조직갈등 등의 후유증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과격하신 것 아닙니까.

<> 홍회장 =그렇게 들렸습니까.

밖에서 보니까 아무래도 그렇게 되나 봅니다.

-은행의 주인 찾아주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부에서는 산업자본의 금융자본지배는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한데요.

<> 홍회장 =예컨대 10대기업을 비상임이사회에서 제외한 것은 말이
안됩니다.

헌법상의 재산권보호에도 위배되는 것이죠.

10대기업도 비상임이사회에 참여토록하되 똑같이 한표씩 행사토록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중요한건 감시기능입니다.

산업자본이 경영에 참여토록 허용하되 "돈흐름"에 대한 감시를 강화,
대기업으로 돈이 흘러가지 않도록 차단장치를 마련하면 별 문제는 없을
것으로 봅니다.

-지방은행장출신으로서 지방은행에 대해 한말씀 해주신다면요.

<> 홍회장 =지방은행은 자신만의 특화된 영역을 구축해야 합니다.

일본 지방은행의 경우 해당 지역시장의 50%이상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도적으로 뒷받침이 되고 있는 탓도 있지만 지방은행자신들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지방은행들도 자신만의 지역밀착형 특화상품을 개발하는데 주력하고
우수한 인재양성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경쟁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물론 제도도 그렇게 바뀌어야 하지만요.

-최근 한러친선협회이사장으로 추대된 것으로 아는데요.

러시아와 무슨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으십니까.

<> 홍회장 =러시아와 수교하기 전인 지난 88년에 러시아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외환은행전무시절이었는데 러시아 대외경제은행과 국내은행중
처음으로 코레스계약을 맺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때 많은 기관의 사람들을 만났는데 아마 그때 인연이 닿아 그렇게
된것 같습니다.

< 양윤모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1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