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는 태양을 돈다"

16세기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는 당시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카톨릭 교회로부터 위험한 사상배로 몰렸다.

비슷한 때 독일의 마틴루터는 "교황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설파했다가
파문됐다.

천동설이 진리였고 교황이 신과 동일시돼 면죄부까지 팔던 당시로선 가히
충격적인 "이설"들이었다.

이뿐아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도 트로키즘이나 트리아치의 구조개혁론은 막스레닌파의
표적이었다.

자본주의에서도 시장을 중시하는 고전경제학이나 균형재정주의 입장에서
보면 케인즈는 위험한 "이단아"였다.

역사엔 이처럼 배척받던 이설이 많았고 그 이설중엔 시간이 흘러 다시
정설로 자리잡은게 적지 않다.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 때로는 진실이 아닐 수도 있고 이설이
오히려 진리에 더욱 가까울 수도 있다는 얘기다.

"실업론"도 그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실업은 일반적으로 나쁜 것으로 돼 있다.

일 자리가 없어 노는 사람들이 많은 경제를 건전하다고 할 수 없는 건
사실이다.

그게 상식이다.

정부가 기반시설에 투자를 하고, 기업에 대한 각종 지원제도를 마련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일자리를 늘려 고용안정을 꾀하자는 게 주된 목적이다.

최근 불황으로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등 감원 바람이 불자 여기저기서
한국경제가 일순간에 실업경제로 전락할 것처럼 난리를 피우고 있는 것도
그러하다.

정부가 실업증가를 좌시하지 않겠다고 나서는 것도 "실업=악"이라는
상식에 기초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실업증가가 무조건 경제의 "독버섯"이냐 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원론적으로야 완전고용이 바람직하지만 완전고용은 산업의 구조조정을
늦추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역설도 얼마든지 성립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옛 소련을 포함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길목에서
고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중 하나가 바로 완전고용이었다.

일할 수 있는 자에게 모두 일자리를 보장해준 게 결과적으로 페레스트
로이카의 걸림돌이 됐다.

일자리를 잃을 염려가 없는 근로자들에게 "개혁"을 외치고 또 기술개발을
요구해봤자 마이동풍인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 반대의 예도 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미국경제는 혼미에 빠졌다.

실업률도 수직 상승해 90년대 초엔 7%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고실업률이 미국경제를 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노동시장에 나온 수많은 유휴인력이 신산업을 일으킨 것이다.

최근 수년간 미국에서 컴퓨터 반도체 소프트웨어 등 정보관련
뉴비지니스가 속속 태어난 것도 풍부한 산업예비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얘기다.

88년 이후 90년까지 종업원 20명 이상인 미국기업들은 135만명을
감축했으나 종업원 20명 이하의 기업들은 4백만명 이상의 인재를 종업원으로
흡수했던게 그 반증이다.

지난 60,70년대 "한강의 기적"도 고실업률에 힘입은 바 크다.

농촌지역의 위장실업을 포함한 광범위하고 풍부한 잉여 노동력을 바탕으로
한국경제는 제조업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실업은 "신산업 일으키기"의 밑거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업자들에겐 안된 얘기지만 우리경제가 지금 추락하는 이유중 하나도
반도체 이후 차세대 산업을 제대로 일으킬 만한 잉여 노동력이 없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실업률 2%대의 완전고용이 지속되다보니 벤처 비즈니스로 흘러 들어갈
여유인력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잉여 노동력이 충분하다고 해서 모든 나라가 경제를 성공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휴 인력이 새로운 산업을 이끌 수 있는 기술과 능력 등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 조건만 충족된다면 어느정도의 실업은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지금 회사밖으로 튕겨져 나오는 고급인력들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을 재교육시켜 신산업의 역군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신산업이 정보산업이라면 "정보화 교육 망국론"이 나와도 좋다.

지난 50,60년대 유휴 고급인력이 노동시장에 넘쳐 흘러 나라 안을
뒤흔들었던 "대학 망국론"이 중진국 진입에 결정적 기여를 했듯이 말이다.

실업자가 늘어나는 침울한 분위기에 감히 코페르니쿠스적 "이설 실업론"을
얘기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