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철 < 제일금융연 회장 >

우리경제는 근년 비교적 고성장을 하고 있는데도 중소업체들의 도산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우리경제가 9%수준의 높은 성장을 했음에도 한달에 평균 1천여개,
연중 약1만4천개의 중소기업들이 부도를 내고 쓰러졌다고 한다.

국민경제의 저변을 형성하는 중소기업들을 살리기 위한 지원책들이 그동안
주로 금융지원을 중심으로 쏟아져 나왔음에도 그 약효는 크게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상황이 나아질 조짐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중소기업 도산의 원인은 크게 실물적요인과 금융적요인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임금상승에 따른 채산성악화, 힘든일 기피에서 오는 인력난, 기술
개발소홀로 인한 소비자이탈등이 겹쳐서 근본적으로 경쟁력을 상실하는
경우인데, 그 표출형태는 결국 자금난으로 나타나 끝내는 부도를 내고
쓰러지게 된다.

후자는 경쟁력과 채산성이 있으면서도 자금원에의 접근곤란, 담보부족,
높은 금융비용, 거래처 부도의 연쇄파급등 금융제도의 미비때문에 때로는
흑자도산도 일어나는 경우이다.

이렇게 볼때 은행의 중기대출확대, 신용보증지원, 대기업들의 대중소기업
어음기간단축과 현금결제권유등 금융지원을 주내용으로 하는 중기대책은
금융적요인으로 인한 중기자금난에는 유효할수 있지만 실물적요인에 따른
중기도산은 막을수 없는 처방이다.

그러면 중소기업 도산에 있어서 금융적요인과 실물적요인중 어느쪽이
더 주된 원인일까.

그것을 계량적으로 분해.계측할수는 없지만 그동안 수많은 금융지원이
이루어졌음에도 중기도산이 계속되는 것은 역시 실물적요인이 주된 원인
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실물적요인들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중소기업들의 경영환경에 대한
우리경제의 기초적 상황(fundamentals)을 진단.분석할 필요가 있다.

우선 고임금과 인력난의 문제이다.

이것은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국민소득 수준이 높아지게 되면
어느나라에서나 겪는 문제이다.

1인당 소득수준이 1만달러를 넘고 그에따라 소비수준이 상승하고 편하게
살려는 레저욕구가 높아진 상황에서 임금수준은 필연적으로 아지기 마련
이다.

더욱이 힘든 일, 위험한 일, 더러운 일을 기피하려 함은 어느 선진국에서도
있는 현상이다.

여기에 대한 해법은 기술개발에 의한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들어 고임금을
상쇄하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임금수준이 낮고 또한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 후발개도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겨가는 길 뿐이다.

외국인 근로자들을 계속 들여와 앞으로 사회적 문제를 배태하기 보다는
그들이 있는 곳으로 생산설비를 옮겨갈수 있도록 중소기업들의 해외 출에
대한 행정지도와 금융지원을 강화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정공법이라고 생각
된다.

일본이 고임금 속에서도 가파른 엔고진행을 극복할수 있었던 것은 재래
생산시설을 일찍부터 한국이나 동남아로 이전하고 그자리에는 끊임없는
기술개발투자에 의한 고부가가치의 신산업으로 메워 나갔기 때문이다.

다음은 경제인프라의 문제이다.

기업경쟁력과 관련되는 경제인프라는 도로 항만 에너지 등 하드웨어적
인프라뿐 아리고 경제제도 교육 법질서등 소프트웨어 인프라도 포함된다.

하드웨어의 예로서 서울도심에서 김포공항에 나가는 경우와 도쿄도심에서
나리타공항에 가는 경우를 비교하여 보자.

도쿄~나라타공항은 전철이 연결돼 있기 때문에 한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확길한 시간에 대어 갈수 있다.

서울~김포공항은 거리상으로 그 반의 반도 되지 않는데 자동차 체증때문에
두시간 정도는 여유를 두고 나가야 마음이 놓인다.

1천만 서울의 유일한 관문인 김포공항을 출입하는 국내선 국제선의 여행객
이 줄잡아 하루 10만명을 넘을 터인데 만약 10년전쯤 도심과 공항을 연결
하는 지하철이 개퇴되었더라면 그동안 허비하지 않았어도 될 시간과 에너지
는 천문학적인 숫자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업활동을 묶고 있는 각종 규제의 철폐 완화가 10년전쯤
시작되었고 정경유착의 고리가 끊어졌더라면 우리 기업들이 그동안 지불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간접비용도 천문학적인 숫자일 것미여 지금쯤 기업들의
역동력은 크게 펄펄해져 있었을 것이다.

금융실명제가 10년전 실시되고 그것을 계기로 기업이나 개인에 대한 세율을
과감하게 낮추어 주었더라면 그동안 탈세 절세 궁리에 소모한 정력을
신제품 개발이나 해외시장 개척에 보다 유용하게 투입할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금리자유와를 좀더 일찍 시작하하였더라면 대기업들만이 접근 가능한
단자사들의 돈이 은행으로 흘러들어 와 중시기업들의 자금 이용기회가
그만큼 컸을 터인데..

경제의 성장과 발전은 구조조정을 몇번이고 거치면서 진행되기 때문에
과정에서 사양산업과 성장산업이 끊임없이 교체된다.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업들은 퇴출되고 새로운 신진기업들이
그 자리를 메워가기 마련이다.

또한 경기순환 측면에서도 시장의 수요.공급원칙에 따라 과잉공급 부문은
그 수급조정이 끝날 때까지 재고가 쌓이고 생산.출하가 줄어 들어 자금난에
몰려 고전할 수밖에 없게 된다.

현재 경영난을 겪고 있는 상당수의 주소기업들 중 아직도 노동집약적인
저부가가치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들이 전자, 즉 구조조정 과정에서 나타나는
경우이고 건설분야 하도급 중소기업들의 어려움이 후자, 즉 수급조정 과정
에서 나타나는 경영난이 아닌가 싶다.

1인당 소득 1만달러의 고임금시대에 1인당 3,000달러, 5,000달러 시절의
제조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업들이 한계기업으로 밀려남은 필연적이다.

세계는 지금 국경 없는 단일경제단위로 수렴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1인당
2,000~3,000달러 수준의 중국이나 동남아 신흥공업국들의 제품들이 물밀듯이
밀어닥치고 있다.

여기에서 살아 남으려면 기술.자본집약적인 고부가가치 상품을 만들어 내는
길 뿐이다.

건설업 분야도 딱하기는 마참가지다.

아파트나 오피스텔의 공급이 절대 부족하던 8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말뚝만 박으면 분양대금이 쏟아져 들어와 남의 돈(입주자들의 돈)으로 집을
얼마든지 지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건축물은 단기성 소비재가 아니고 내구연한이 50년, 100년이 가는
최내구재 상품이기 때문에 건축경기가 한없이 지속될 수는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전거 경영을 계속하는 건설업체들은 자기자금이 한없이
많거나 그렇지 못하면 엄청난 금융부담(땅값, 미분양 재고 아파트) 때문에
쓰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경우 안타깝게도 거기에 관련된 수많은 중소하청업체들도 모기업과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우리 경제의 기초적상황이 미숙하고 주로 구조조정 과정과 과잉
공급 부문의 한계기업들이 도산을 일으키고 있다면, 중소기업 지원의 기본
시각은 분명해진다.

각종 금융지원 시책은 이들 한계기업들에게 구조조정을 극복하고 초과공급
상태를 시정하는데 필요한 시간 벌기의 효과는 줄 수 있어도 문제의 근본
해결책은 될 수가 없다.

따라서 중소기업 지원의 주력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경제의 기초적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경제인프라의 대폭 확충, 제로.베이스의 규제 완화,
과감한 금융.세계개헉의 중단 없는 추진에 두어야 한다.

중소기업 지원의 초점은 퇴출되는 한계기업들보다는 신기업의 창업과
진입촉진에 모아져야 할 것이다.

대발이 무성해 지려면 이미 시들어 가는 노죽에 연연하기보다는 새 죽순이
더 많이 돋아 나오도록 대발의 토양보강에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