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북경에서 세계여성대회가 개막되기 전날 부원들과 함께 영화 "개같은
날의 오후" 시사회에 참석했다.
사회문제로서의 여성문제와 노인문제라는,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분위기는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객석은 시종일관 웃음으로 가득찼다.
여성관객의 카타르시스효과를 겨냥한 점에서는 충분히 성공한 듯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난 남자부원들의 반응은 대부분 "글쎄"였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으로는 남성의 폭력과 외도,우월주의에 대한
경고내지 응징이라는 주제는 그다지 설득력을 지닌 것같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희화화된 내용으로 인해 자신들과는 상관없거나 설사
있다고 해도 "그러니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가 아니라 기분 나쁘게 여기는
경향이 강해 보였다.
화장품외판원을 하며 뒷바라지를 하는 아내에게 주먹질을 하다 못해
허리띠를 휘두르는 백수고시생, 같은 아파트단지에 사는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도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전자제품수리공, 집에 전화를 건 뒤 부하
에게 하듯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실시"를 외치는 경찰관.
"개같은날의 오후"에 등장하는 남성들의 모습은 분명 다소 과장돼 있다.
그러나 양상은 다를지언정 우리 사회 어딘가에 존재하는 유형들이다.
남성, 그것도 젊은 지식인층에 속하는 이들이 이처럼 비정상적인 듯한
인물들을 내세워 남성과 여성의 대결구도를 만든 영화에 대해 언짢아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웃는 여성중에 행여 영화의 내용을 자신과는
무관한 일로 여기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싶은 것은 기우일까.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일체감을 느끼고 함께 행동하며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성원하는 것은 혹시 영화속에만 있는 상황은 아닐까.
실제로는 적잖은 여성들이 영화속의 문제를 제몫을 못찾은 일부 못나고
불행한 여성들의 문제로 치부, 강건너 불보듯 하는 것은 아닐까.
국내에서 "개같은 날의 오후"가 개봉되는 동안 중국북경에서는 전세계대표
4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세계여성대회가 계속됐다.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는 주제로 열린 이번 북경여성대회에서는
여성교육과 함께 정신대문제의 해결이 가장 큰 이슈로 떠올랐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동남아각국이 일본측에 정신대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요구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지 50년이 지나도록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일본은 물론 피해국의 남성들까지 외면하려 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
이었겠지만 실은 여성 스스로 창피하다는 이유로 주위의 불행을 모른체 해온
것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또하나의 까닭이 아니었을까.
정신대피해자들은 "드러난 소수"에 속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드러난 소수는 불편한 존재로 여겨진다.
다수가 되면 어쩌지 못하는 경우도 소수면 어떻게든 드러나지 못하게
막으려만 하는 것도 그같은 까닭에서일 터이다.
드러난 소수라는 이유로 외면당하는 것은 비단 정신대피해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남성 혹은 권력중심주의 사회의 피해자로 문제제기를 한 사람 또한 드러난
소수로서 곱잖은 시선을 받는다.
많은 장애자들이 사회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것도 드러난 소수에 대한
갖가지 냉대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여성문제는 결코 외면하거나 눈총을 줌으로써 가라앉힐 수
있는 드러난 소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정신대문제가 피해국들의 외침만으로 해결될 수 없듯 남성의 폭력과 외도,
우월주의 또한 여성들이 일방적으로 응징하거나 타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대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일본 스스로의 자각과 반성이 있어야 하듯,
여성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남성들 사이에 세상은 남녀가 함께 만드는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
그같은 인식의 전환과 확산에 여성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성문제를 자신과는 다른세계 사람들의 문제, 부모와 남편을 잘못
만났거나 처신을 올바로 못한 복없는 여자의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한 남성우월주의는 사라지기 어렵다.
모든 문제를 잘못된 남성위주사회, 남성의 편견에 의한 것으로 몰아부치는
태도 또한 여성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성 스스로 여성과 남성 모두를 자기편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핑계
대지 않고 자신의 몫을 다할 때,그리고 이런 여성을 적이 아닌 동반자로서
격려하는 남성이 늘어날 때 여성과 남성이 패싸움을 벌이는 "개같은 날의
오후"는 다시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모두 함께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