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라는 용어는 서양의 Art 개념을 일본에서 한역하면서 만든
신조어인데 이제는 보편화된 단어로 쓰이고 있다.

여기서 미자는 양과 대가 합친 글자다.

중국인들이 양육을 좋아하는데서 만들어진 글자라고도 하지만 고보다
길상수복의 현세적인 기복사상에 젖은 그들이 상서로움(상)을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낸 글자로 보는 것이 앓을듯 하다.

상자는 양으로 통하고 그 밑에 대자를 받쳐서 만든 글자가 미자인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미에는 모든 것을 다 갖춘다는 종합적 미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아름답다"는 우리말의 어원은 무엇일까.

어떤이는 아름,앎,곧 지식인답다는 뜻이라고도 하지만 전성동명사에
"답다"라는 접미사가 붙어 형용사가 되는 말은 없다.

"아름"은 본래 제 몫을 갖고있었던 명사임에 틀림없다.

15세기 우리고어에 나(사,아,오)를 지칭하는 말로 "아<>"이라는
낱말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름답다"는 말은 곧 "나답다","나스럽다","나와 동일시하다"라는
물아일치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 되겠다.

내가 생각한것과 상대방이 접근했을 때 "근사한데"라고 칭찬하는
것고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이렇듯 미가 나와 남의 일치된 관계에서 비롯된다면 아름다움은
곧 사랑스러움으로 일치된다.

두팔을 벌려 남을 한아름(포)안은 사상은 아름다운 것이다.

동양의 예술관에 인격완성의 독특한 윤리관이 존재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수 있다.

아름다움은 자아의 완성으로 부터 비롯된다.

가장 자기(아<>)다운 바탕위에 남(물)과 일치를 이루었을 때 그림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석가께서 제자 가섭과 연꽃을 들고 빙그레 웃으며 이심전심 했음도
사제간에 스승답고 제자다운 아름다운 사랑의 일치가 있으므로써
가능했을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은 것은
"네가 나를 너(아<>)답게 여기느냐?"라느 말일 것이다.

곧 "네가 나와 일치하도록 아름답게 보이느냐?"고 물은 것이다.

미는 아름다운 것이고 남을 나답게 사랑하여 하나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니,그림이 곧 사랑인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