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후 일행은 무사히 장안에 닿았다.

영국부 사람들은 대옥을 데리고 영국부로 들어가고, 우촌은 다음날
의관을 정제하고 시동을 앞세운채 영국부로 갔다.

"뉘시오?"

영국부 수위가 우촌을 아래 위로 훑어보며 물었다.

"영국부 종문의 조카뻘 되는 사람이오"

우촌은 자기 이름이 적힌 명첩을 내밀었다.

수위는 우촌의 늠름한 풍채에 눌려 더 이상 따져 묻지도 않고 문을
열어주었다.

우촌은 보옥의 아버지 가정 대감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가정은 토목건설과 치수사업을 맡아보는 관청인 공부의 원외링으로
임명되어 있었는데, 이미 매부인 여해의 편지를 받아 보았으므로
우촌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가정이 직접 우촌을 만나 보니 여해가 편지에서 말한 그대로 사람
됨됨이가 여간 듬직한 것이 아니었다.

가정이 우촌의 복직을 위해 여기 저기 힘을 써주었다.

그래서 우촌이 복직청원서를 올리자마자 복직통지서가 내려왔다.

복직이 허락되었으니 결원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우촌은 두달 정도 기다리고 있다가 금릉성 응천부에 결원이 생기자
그 곳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야심만만한 관료생활이 재개된 셈이었다.

한편 대옥의 사정은 어떠했는가 살펴보자.

대옥이 그 날 배에서 내려서 보니 영국부에서 온 가마와 짐을 나를
수레들이 부두에 늘어서 있었다.

그 가마와 수레들의 형용만 보더라도 영국부의 위세가 어느 정도
되는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대옥은 가마를 타고 영국부로 오면서 가마의 비단 문발을 살짝 들고
장안 거리를 구경하였다.

대옥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장안 거리였다.

구와 가로 정연하게 나뉘어 있는 번화한 거리들, 그 거리를 따라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각양각색의 집들, 삐죽삐죽 올라간 지붕들,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활달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장안 사람들,
힝힝 콧김을 내뿜으며 수레를 끌고 있는 우람한 말들, 울긋불긋한
성문들.

어느것 하나 새롭지 않은게 없었다.

대옥은 여기 장안에 와서 자기가 시골 구석에서 자란 티가 나면
어쩌나 하고 은근히 염려가 되기도 하였다.

한참 장안 거리를 통과하여 북쪽으로 나아가니 나란히 서 있는
거대한 두개의 돌사자 조각상이 문득 시야에 들어왔다.

돌사자상 뒤에 있는 세칸 크기의 대문에는 짐승들의 머리가 조각되어
붙어 있었는데, 그 앞에는 화려한 관과 복장을 차려 입은 사람들이
열명 가량 앉아 있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