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은이 꿈에서 깨어나 멍하니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한여름 뜨거운 뙤약볕에 파초 잎이 축 늘어져 있었다.

유모가 진사은의 딸 영련을 안고 왔다.

영련은 커갈수록 옥으로 다듬은 듯 점점 예뻐졌다.

사은은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미인박명이라고 했는데
너무 예뻐지면 그 운명이 박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런 염려는 나중에 가서 할일이었다.

유모가 안고 온 영련을 보자 사은은 그저 귀여워 얼굴에 움음꽃이
피었다.

사은이 손을 뻗어 유모로부터 영련을 받아 품에 안고 한차례 둥둥
얼러주고는 영련을 안은 채 거리로 나왔다.

왁자지껄 번화한 거리를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저쪽에서
승려 한 사람과 도인 한 사람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사은이 꿈속에서도 승려와 도인을 보았는데 현실에서도 그들을 보게
된것이었다.

그러나 꿈속에서 본 승려와 도인의 모습과 지금 저쪽에서 걸어오는
승려와 도인의 모습은 천양지판이었다.

승려는 박박 깎은 머리가 문둥병자처럼 문들어지고 발은 신도 신지
않은채 맨발이었다.

거기다가 도인은 봉두난발에 절름발이였다.

그 둘은 뭐라뭐라 급하게 말들을 주고받으며 다가왔다.

그런데 집앞에서 사은이 영련을 안고 있는 것을 보고는 승려가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다.

그리고는 영련을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다.

사은은 별미친 사람도 다 있다 하고 상대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승려는 이상한 시를 한 수 지어주고는 도인과 함께 총총히
사라졌다.

그제서야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구나 하고 느꼈지만 그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우두커니 문앞에서 서서 무얼 하십니까? 무슨 새로운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사은이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가우촌이었다.

우촌은 그의 별명으로 이름은 화요, 자는 시비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자처럼 시절을 좇아 날아오르지 못하고 빈둥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호주태생인 그는 원래는 좋은 가문 출신이었으나 조상들이 물려준
재산을 탕진하고 이제는 주변에 일가친척 하나 없이 외로운 신세가
되어 있었다.

고향에 있어보았자 별 뾰족한 수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서울로 올라가
과거 시험을 봐서라도 공명을 되찾아 집안을 다시 일으켜 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2년전에 이곳까지 흘러들어 절간인 호료묘
신세를 지며 남을 위해 글이나 지어주면서 입에 풀칠을 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진사은과 자주 교제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