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죽으면 노예들을 죽여 함께 묻었는데 그 수가 많을때는 100여명
이나 됐다고 한다.
또 동옥저에서는 길이가 10여장이나 되는 큰 목곽을 만들어 놓고 죽은
자를 임시로 매장했다가 육탈이 된 후에 뼈만 곽에 넣어 일가족을 모두
하나의 곽속에 안치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신라의 문무왕은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하고 그 뼈를 가루로 만들어 동해에
뿌리게 했고 통일신라시대의 효성 선덕 진성여왕,효공 신덕 경명왕도 화장을
했다.
"생사일여"라는 불교의 교리에 따라 귀족이나 백성들의 화장도 성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꼭 화장만을 했던 것은 아니다.
아도나 이차돈도 사불산의 승려들은 매장을 했으며 망덕사의 승려 선율은
명부에 까지 갔다가 무덤속에서 환생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자장은 화장한뒤 그 유골을 동굴속에 안치했고 설총은 유학자이면서도
원효를 화장해 그 유골을 가루로 만든다음 다시 원효의 모습대로 빚어
분황사에 봉안하는 특이한 장법을 썼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까지는 고대의 고유한 상례와 더불어 이미
삼국이전부터 중국에서 들어온 유교적인 장속이 변형내지 혼용돼 왔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화장보다는 매장이 흔했다.
화장을 한후에도 유골을 곽에 담아 다시 매장하는 경우가 있는 것도
매장이 단연 우세했음을 보여준다.
사자의 혼백은 생자의 정신과 육체처럼 사후세계의 생활을 하는 것이며,
그래서 생자와 똑같이 의 식 주를 필요로할 뿐 아니라 살아 있을 때의
사회적 지위도 누릴수 있다고 옛 사람들은 믿었다.
지금도 죽음이라는 사건이 생자와 사자를 단절시켜 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의 긴밀한 관계가 상례를 통해서 지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그런 의식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절감하게 된다.
"제여재"(조상이 곁에 계신듯 제를 지내라)는 말도 실은 그런 뜻이다.
서울시가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용미리묘지"에 3,000여평 규모의
"가족 납골묘" 단지를 시범적으로 조성해 연말까지 일반에게 분양한다는
소식이다.
2~3평규모의 방에 5~6대의 유골을 30기까지 안치할 수 있다니 갈수록
심각해 지는 묘지난 해결방안의 하나가 될듯 싶다.
그러나 지난해 서울시의 화장률이 20%에 크치고 있는 형편을 보면 아파트를
지어 입주시키듯 그렇게 해결될 문제는 시대에 따른 예속의 변천은 필연적
이라지만 "가족 납골묘"에 조상을 모셔놓고 후손들의 마음이 편해지기
까지는 아직 꽤 오랜 세월이 흘러야할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