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술 더 뜬 김정일의 생일잔치 놀음을 엿보면서 딱하다 못해 온갖 잡상이
날아든다.

과연 우리 겨레가 그리도 아둔하고 철없는 인종인가, 상상을 초월한다.

하긴 봉건제에 익숙했던 서양에 신분상속이 없을순 없다.

잔해만 남은 유럽군주들의 왕위세습 말고도 케네디 부시가등 대이은 정계
진출이 없는건 아니다.

그러나 선거문화의 틀이 짜인 그곳에선 감이 다르다.

장경국의 총통승계는 김부자 경우와 다르다 해도 상큼하지 못한 면에선 큰
차는 없다.

일본정계에도 선거구 상속이 심심찮게 화제를 뿌려 오지만 오랜 봉건전통에
비추면 하찮은 정도다.

노포나 가업의 전승을 배운다면 또 모르되 엉뚱하게 신흥 한국 권세가에서
부전자승의 정치상속 바람이 이는 모습은 달가워 뵈질 않는다.

더구나 선대 입신의 투명성조차 공증되지 않아 송사마저 이어지는 계제에
말이다.

해공 유석 진산등 전에도 대정객 영식들의 의회진출 예가 불무했으나
모두 부친사후의 일로 세습과는 멀다.

요즘 몇몇 2세들은 생존하는 부친의 후광을 업고 정계진출과 영향력
확대를 시도해서 이목을 끄는 것이다.

성공 가능성뿐 아니라 그런 작풍의 윤리적 타탕성, 만연 가능성까지
관심사다.

수천년 전제왕정을 공화제로 대치한 상해임정의 선견지명까진 소급하지
않더라도 헌정 반세기를 맛본 오늘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과연 그 역린을
고이 삼킬지 궁금하다.

"자녀가 원하는 길, 부모가 밀어준다"는 소박성으로 삭이기엔 정치의
과거가 너무 시꺼멓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현실로 불거지는 곳은 엉뚱한 쪽이다.

임박한 지자제다.

미리 말하지만 법에 명시된 6월27일 선거를 하지말자는 것은 절대 아니다.

선거전에 할수 있다, 선거를 연기하더라도 해야한다는 요즘 시비의 초점인
행정구역 조정쯤은 비교도 안될 문제거리가 있다.

다름아니라 지자제로 지방행정 전면에 불어닥칠 혈연주의의 만연 우려다.

옛날 서당의 동문수학 처럼 현대의 학연도 큰 화근거리지만 그래도 그것은
피보다는 덜 진하다.

여태껏 반.상촌 형체가 온존하는 전통고을을 떠올려 보자.

지사 시장 군수는 물론 지방의원을 둘러싸고 문벌간의 각축은 뜨거울
것이다.

혈족, 적어도 인척안에서 고을수령을 내려는 다툼은 예상을 넘어 과열될
것이다.

그간의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과는 많이 다르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 법상 독립관청인 자치단체장에게 부여된 막중한 권한에
있다.

최근 노출된 지방세 부정은 숫제 생도둑이니 논외로 치자.

단체장 권한은 합법을 위장한 남용 가능성이 높은게 특징이다.

큰 감투가 흔한 서울에선 군수쯤 하찮다 볼지 모르지만 그 권한은 옛 원님
을 능가한다.

네죄를 네가 알렷다면서 곤장을 치는 형벌권이 없는 대신 악용만 당하면
돈벌이와 직결될 이권의 열쇠가 무진장 장중에 있다.

근래 대표적인 군의 소관업무로는 토지관련 인허가권이 꼽힌다.

그중에도 꽃은 지목변경이다.

가령 요지의 단 몇평 지목을 1등급만 올려도 시세좋은 곳에선 차액이
보통 억단위다.

그런 복마전에선 원님이 그걸 원하지 않아도 유혹의 손길을 당할 장사가
드물다.

무슨 무슨 위원회들이 있지만 그 임면에 단체장이 영향력을 쥐는 한 대책은
별무다.

벌써 떠도는 군수후보 정당공천에 10억이다 운운하는 소리는 농담만이
아니다.

더 무서운건 그 꿀단지를 오래오래 차지하려는 족벌의 흉계다.

단체장의 연임을 1회로 제한한 현행규정은 헐겁다.

유지일족의 수령 독과점 경쟁은 두통거리가 될것이다.

그러나 길을 막고 물어도 지자제 그만두자는 대답은 안 나온다.

하도 오래 중앙 절대권력에 눌려서 지방분권이 바로 민주화라는 신화가
생겼다.

인구의 서울집중 완화에도 첩경이라는 믿음도 겹쳐 있다.

그건 틀림없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더이상 지자제의 연기.후퇴는 안된다.

이왕 할바엔 권한을 듬뿍 이양할수록 좋다는 욕심도 들린다.

주민자치는 곧 국민합의인 것이다.

그러나 과욕은 금물이다.

목이 탈수록 후후 불며 천천히 마시라고 바가지에 버들잎을띄워 길손에
건네주던 규수의 지혜는 옛날얘기의 단골 소재였다.

지금이라도 늦진 않다.

행정구역은 단시일내 손대기 어렵다 하더라도 업무의 중요도와 성질에
따른 이양폭 조절, 단체장 재량범위의 설정, 인사예규의 표준화, 행정.경리
감사의 효율화등 여러 안전장치들이 이제부터라도 모색 반영돼야 한다.

동시에 중요한 것은 돈 적게 들고 파벌에 공정한 선거다.

대통령의 의지가 추상같으니 희망은 있다.

그러나 손이 안으로 굽는 "우리"식 가치관 불변이 근본문제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점잖아도 한국인이라면 자신이 속한 동아리에 무조건
복속한다.

의리라는 최고의 미덕이다.

피붙이 동창 동향인 봐달라는 청탁으로 일과를 삼아야만 "사람됐더라"는
평이 나돈다.

그래야 인물로 인정받아 출세길도 열린다.

이치따져 거절만 일삼다간 칭찬 커녕 재목 못된 낙제점이다.

세계화 고창속에도 미풍보존 핑계로 구습을 되살리며 표만 나온다면 후퇴도
서슴지 않는, 그래서 합리의 외침은 설 땅을 잃는 발전아닌 퇴보를 우리는
언제건 걷고 있다.

북의 생일놀이 처럼 남의 감투놀이 또한 망국지인이란 생각이 든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2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