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마고우인 다니구치가 실은 나카지마 일등경부가 보낸 첩자였던
것이다.

경찰의 끄나풀인 줄을 모르고 옛 친구라 하여 믿고서 실토를 해버린
일이 죽고 싶도록 후회가 되고,또 다니구치 그놈의 배신을 생각하면
물어뜯고 싶도록 치가 떨렸으나,이미 끝장이었다.

눈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무지막지한 고문 앞에 나카하라는 뱃속의
창자까지 토해내듯 함께 암살 지령을 받고 밀파되어 온 일행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날이 새자 대대적인 체포작전이 시작되었다.

나카하라와 함께 침투해 온 나머지 암살단원 스물두사람 뿐 아니라,정부의
밀정으로 여겨지는 수상한 자들을 닥치는대로 모조리 잡아들였다.

며칠동안에 무려 70여명의 용의자가 붙들렸다.

밤으로는 화약고를 습격하는 사건이 잇따르고,낮으로는 암살단원과
밀정 용의자들을 뒤쫓아 잡아들이느라 온통 뒤숭숭한 가운데 고네시메에서
수렵을 하고 있던 사이고가 돌아왔다.

기리노가 보낸 사자로부터 화약고 습격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았던
것이다.

사이고가 돌아오자,그날밤 기리노를 비롯한 사학교당 간부 여덟사람이
그의 집을 찾아갔다.

그들은 사이고 앞에 정중히 꿇어앉아 대표격인 기리노가 화약고
습격사건의 전말을 보고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사이고는 기리노의 보고가 끝나자 대뜸,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지른 거요" 하고 냅다 호통을
치듯 내뱉었다.

"무모한 짓이 아닙니다.

난슈 도노,가고시마에 있는 무기와 탄약을 오사카로 옮겨가는 의도가
뻔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한 다음에 구마모토 진대에 명령을 내려 불시에 가고시마를
침공하려는 수작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있습니까" "정부의 화약고를 습격한다는
것은 곧 봉기를 뜻하는 거요.

지금이 봉기를 할 땐가요" "바로 지금이 봉기를 감행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기다리는 데도 한도가 있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된단 말입니까.

이곳의 무기와 탄약을 딴곳으로 옮겨가는 처사는 충분히 봉기의
이유가 됩니다.

난슈 도노,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안되오.그것으로는 명분이 약하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야 명분이 섭니까.

폐도령도,금록공채발행조령도 명분이 안된다고 하시더니,무기와
탄약까지 옮겨가 우리의 목을 조이려 하는 데도 명분이 약하다니,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리고 난슈 도노,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무척 송구스럽습니다만,실은
난슈 도노를 암살하려는 자객들이 붙들렸습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