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김영규특파원] 우리기업이 유럽에 생산기지를 세우기 시작한것은
80년대 후반,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유럽 주요국에서 나름대로 빠른
속도로 현지화를 추진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넘어야할 벽인 일본과 비교하면 현지화수준은 여전히
걸음마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양과 질 모든면에서 일본과는 엄청난 격차를 보이는게 현실이다.

이는 유럽연합(EU) 12개회원국에 대한 양국간 투자규모를 비교해 보면
손쉽게 알수있다.

지난해말 현재 우리의 대EU 투자는 5억3천만달러 남짓한데 반해 일본은
1백30배가 넘는 7백억달러에 이르고있다.

특히 유럽통합이 가시화된 지난 88년이후 3년간 일본업체가 유럽대륙에
쏟아부은 돈은 우리 투자규모의 57배정도인 3백억달러를 넘고있다.

투자대상도 제조업의 경우 우리는 가전 오디오를 중심으로하는
전자분야에 집중되는 "편중양상"을 보이고 있다.

기계장비 석유화학등에도 진출했으나 그 규모는 영세한 편이다.

주력 수출품인 자동차분야도 기아가 독일에 합작조립사를 세울뿐
본격적인 생산기지는 가동되지 않고있다.

반면 일본은 전자는 물론 자동차 섬유등 전업종에 골고루 진출하는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

우리의 주력업종인 전자분야에 대한 투자비율은 15.2%에 불과하다.

우리가 사양산업이라며 회피하는 섬유분야에 대한 투자비중이 14.2%,
기계 15.4%,수송기계 5.2%,위스키원료등 식품분야도 5%이상을 차지한다.

투자방식을 비교해도 양국기업간 엄청난 차이를 발견할수 있다.

우리기업들은 유럽현지에 새로운 공장을 짓는데 주력하는 양상이다.

기존업체를 인수하거나(삼성전관및 삼성코닝) 외국기업과 합작(삼성전자)
하는 예는 소수에 불과하다.

일본은 다르다.

새집을 짓는것 못지않게 기존 기업을 인수하거나 지분참여를 통한
영향력 확대에 상당한 신경을 쓴다.

지난 91년 한햇동안 일본기업이 흡수합병한 유럽기업은 25개사에
이른다.

또 프랑스의 대표적 컴퓨터업체인 불그룹의 지분율 4.4% 소유하고 있는
NEC사는 이 지분을 10%선까지 확대할 계획이며 지난달에는 스미토모그룹이
섬유염색물을 생산 판매하는 벨기에의 CAPA사를 인수하는등 그 움직임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부품및 인력의 현지화수준에도 큰 차이가 나타난다.

우리기업의 부품 현지화수준은 EU의 일반적 규정인 40%를 조금 웃도는
실정이나 일본은 70%선을 넘어섰다.

협력업체와 동반진출을 활발히 한 결과이다.

또 부장급이상 경영진율 현지인으로 대체한 기업이 일본은 40% 정도인데
반해 우리는 전무한 실정이다.

자금줄을 쥐는 재정분야 외에는 현지인에게 위임하겠다는게 일본의
전략이다.

양국간 현지화정도의 차는 유럽에 유통되는 양국 제품간 가격차 만큼
벌어져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이같은 격차는 어디서 출발한 것인가.

(주)EU대표부의 이희범상무관은 이런현상이 나타나는 주요요인을
양국간 대EU진출전략의 차이에서 찾고있다.

상공자원부 전자공업국장을 지낸 이상무관은 "일본기업은 유럽통합에
대응,현지진출을 확대해 갔으나 우리 기업들은 유럽의 수입규제와
국내의 노사분규를 피하는 전략으로 유럽을 택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일본은 현지화가 그 목적이나 우리는 피해를 줄이려는 단견에서
시작됐다는 얘기다.

유럽진출 역사가 짧기 때문이란 변명은 설득력이 없다는 뜻을 담고있다.

채훈 브뤼셀무공관장은 "현지 사정을 충분히 파악하지 않은채 성급하게
유럽에 진출한것도 일본과 다른점"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은 유럽에 생산기지를 세울때 동반 진출할 부품업체가 자리할 공간을
마련하는 치밀함을 보이는데 반해 우리는 사전 준비작업에 소홀한채
성급히 진출,상당한 후유증을 겪고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삼성전자 영국 컬러TV공장의 경우 지난 87년 전자레인지를
생산하다 92년12월 중단했고 88년부터 VTR를 생산하다 92년3월 스페인
으로 이전했다.

또 91년부터 팩시밀리라인을 운영하다 1년만에 포기하는등 불과 7년만에
사업목적이 4차례 변경됐다.

해태전자는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있고 금성사의 나폴리 냉장고공장
대우중공업외 벨기에 중장비공장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있다.

결국 우리기업이 유럽대륙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부품현지화규정,
과도한 환경비용,높은 병가율등 극복해야할 장애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일본의 벽을 넘어야 하는게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것이 현지 통상관계자
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유럽은 기업의 국적조차 따지지않는 세계화의 현장으로 변신하고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란 구호를 내걸고 지켜온 사회보장제도까지
포기하며 외국기업에 눈길을 보내고 있다.

세계 교역량의 30%이상을 차지하는 유럽대륙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일고있는 세계화 물결에 순응,현지화를 꾸준히 추진하는
길 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