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않아도 사이고가 낙향해 간 뒤로 마치 그 곳이 일본 안의 독립지대
처럼 변해가고 있는게 여간 못마땅하지가 않은 터인데, 이번에는 이웃
현과의 통행도 차단하다시피 하여 삼엄한 통치를 펴고 있으니, 무슨
속셈인지 알수가 없어 여간 염려가 되는게 아니었다.
마침내 사이고가 무력 봉기를 하려는 모양이니, 대책을 서둘러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했다.
오쿠보는 곤혹스러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난처한 입장이었다.
가만히 내버려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섣불리 손을 댈 수도 없었다.
마치 야생의 벌집 같다고나 할까.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벌떼를 긁어 일으키는 꼴이 될 것이고,
그렇다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벌들은 점점 제멋대로 설쳐댈게 아닌가.
고향 가고시마는 이제 그에게는 참으로 골치아픈 곳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사이고를 생각하면 아무리 냉철하고 강인한 오쿠보지만 때때로
가슴 한쪽이 아리하게 아파오는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형제처럼 지냈고, 그리고 둘도 없는 동지로서 막부를 타도
하고 왕정복고를 이룩했는데,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는 길에서 서로 정면
대립으로 치닫게 되어 마침내 돌이킬수 없는 정적으로 갈라서고 말다니.
생각할수록 안타깝고 괴로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달이라도 밝은 밤이면 문득 그런 생각에 오쿠보는 혼자 저녁술을 마시며
냉혹한 정치의 세계, 그리고 권력의 속성을 한탄하기도 했다.
비록 인조 수염을 달고 위세를 부리고 다니는 독재 권력자이기는 하지만,
그도 인간임에는 틀림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고시마현에 대해서는 예외로 불간섭주의를 취해 왔다.
내무경으로서의 그의 그와같은 차별 정책을 비판하는 소리도 없지 않았다.
어느날 구로다 기요다카가 오쿠보의 집무실을 찾아왔다.
조선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온 그는 태정관의 참의로 임명되어
급속히 실력자로서 부상하고 있는 터였다.
"오쿠보 도노, 고향쪽이 요즘 예사롭지가 않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구로다 역시 옛 사쓰마번 출신이었다.
"알고 있소"
"언제까지나 방치해둘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폐도령이 공포
되었는데, 오히려 전에는 칼을 안차고 다니던 것들까지 모조리 와키사시까지
차고 거들먹거린다니 될 말입니까? 우리 고향이 왜 그 지경이 됐는지 정말
한심합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