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가 가져온 술병을 오야마가 받았다.

"사이고 도노, 너무 취하신 것 같습니다. 그만하시지요"

"그만하다니, 폐도령이 내렸는데,안 마실 수가 있소? 자,어서 따라요"

"그럼 한잔만 더 드시고 그만하세요. 나머지는 제가 다 마실테니까요.
이러시다간 건강을 해치시겠어요"

오야마가 따라주는 술잔을 사이고는 또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켰다.

도무지 치솟는 분노를 가눌 길이 없었던 것이다.

폐도령은 유신정부로서는 마땅히 취해야 할 조치였다.

봉건시대를 마감하고,새로운 자본주의 근대사회를 열어나가는 과정이니,
봉건제도의 상징이라고 할수 있는 칼을 사족들로부터 빼앗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이미 징병령을 포고하여 사족이라는 특권층을 인정하지 않게된 마당이니
말이다.

만약 사이고가 지금까지 태정관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그도 폐도령
을 결코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위정자라도 그 시기가 문제일 뿐,실시하지 않을 수가 없는 과제
였다.

그러나 야인이 된 사이고는 처지가 크게 달라진 터이라, 그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수 없었다.

사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사학교를 설립하여 사설 군대를 양성하고 있는
그로서는 폐도령은 바로 자기의 작은 왕국에 가해지는 박해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폐도령은 곧 오쿠보의 조치인 셈이니,그녀석이 이번에는
직접 자기의 목을 조이려고 나선 것과 마찬가지로 여겨졌던 것이다.

사이고의 분노하는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오야마는 기회를
포착했다는 듯이 서슴없이 입을 열었다.

"사이고 도노,결단의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 이런 수모를 겪으면서도
참으시겠습니까?"

"음-"

그 말에는 아무리 취했어도 함부로 대답할 수가 없는 듯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신음소리를 흘렸다.

"폐도령은 곧 사족들로부터 칼을 빼앗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차고 다니지 못하는 칼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왕정복고를 위해서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싸운 우리 가고시마의 사족들이
아닙니까. 그들로부터 칼을 빼앗다니, 혼을 빼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니까요.

그리고 앞으로 사학교의 운영에도 막대한 지장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결단을 내리셔야 된다니까요"

가만히 두 눈을 뜬 사이고는, "결단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소"
약간 혀가 굳어진 듯한 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