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다의 서찰을 읽은 것은 에노모토 혼자만이었다. 첫번째 서찰과
마찬가지로 결국 항복을 권유하는 글이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사신이어서
각료들에게 공개할 성질의 것이 못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술선물의 진의도 그만이 알고 있었다.

이런 경우에 말로써 그 술에 대하여 설명하기는 지극히 곤혹스럽고, 또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잠시
생각한 다음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노모토 총재가 말없이 일어서자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고, 모든
시선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에노모토는 뚜벅뚜벅 걸어서 술통과 다랑어가 놓여있는 곳으로 갔다. 그
앞에 멈추어 서더니 곁에 준비되어 있는 술잔 한개를 집어드는 것이었다.

그러자 눈치를 알아챈 오쓰카가 재빨리 에노모토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술을 따라 드릴까요"

에노모토는 말없이 고래를 끄덕였다.

오쓰카는 술통 한개의 마개를 뽑았다. 그리고 번쩍 들어서 에노모토가
쥐고 있는 넓적한 술잔에 가득 따랐다.

에노모토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단숨에
잔을 비우고 나서 그는 여러 부하들을 향해 싱그레 웃어 보였다.

와... 실내에 환성이 울렸고, 투닥투닥 박수소리가 일어나기도 했다.

"자, 우리도 마시자구요"

"그럽시다. 까짓것..."

"마시고 볼 일이지 뭐. 허허허..."

"히히히..."

얼씨구 좋다는 듯이 우르르 자리에서들 일어나 술통 곁으로 다가들었다.

술에 독이 들었느니, 취하게 해서 공격하려는 계략이라느니 하고 마시기를
반대하던 사무라이들도 안마시면 나만 손해겠구나 싶은 듯 멋쩍은 표정으로
슬금슬금 끼여들었다.

주연은 꽤 오래 계속되었다. 두달 가까운 동안 전투에 지친 사무라이들은
오래간만에 싱싱한 다랑어회를 안주삼아 실컷 마셔댔던 것이다.

그런데 주연이 계속되는 동안 보루에서 경계를 펴고있던 군졸들은
술렁거렸다. 자기네들은 제쳐두고서 간부급들만 모여 술을 마시는 것도
불만이었지만, 그것보다도 적장 구로다가 보낸 술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도대체 돼먹질 않았다고 분노를 터뜨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날밤 꽤나 취한 에노모토가 자기 방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려고 옷을
벗고 있는데, 오쓰카가 들어섰다.

"총재님, 야단났습니다. 군졸들이 수없이 도망을 치고 있다지 뭡니까.
사살명령을 내리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