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균질의 언어'를 구사하는 시인 이수명씨(36). 그에게 겹경사가 생겼다. 며칠 전 제2회 박인환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데 이어 20일에는 그의 세 번째 시집 '붉은 담장의 커브'(민음사)가 출간된다. 가을 바람이 낮게 일렁이던 지난 17일 저녁 9시. 청량리 역광장 2층 카페에서 시인을 만났다. 흑백톤의 차분한 모습으로 창밖을 보고 있던 그가 돌아보며 웃는다. 단정한 표정이 시구처럼 담백하다. 하지만 시인은 아프다. 얼마 전부터 위가 쓰려 새벽에 자주 깬다. 그는 "내일 아침 내시경 검사를 하기 때문에 물 한 잔도 못 마시는데…"라며 오히려 미안해했다. 새 시집을 갈무리하는 동안 얼마나 내상(內傷)을 입었을까. 이번 시집에서 그는 가을 볕에 잘 여문 알곡처럼 단단하고 긴장감이 팽팽하게 느껴지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사물의 중심으로 끝까지 파고 들어가 핵심을 건드리는 어법 등이 돋보인다. 그는 표제시 '붉은 담장의 커브'에서 '담쟁이덩굴은 담쟁이덩굴의 커브를 돌고/거미는 거미줄을 치며 커브를 돌고/북태평양의 태풍은 어느 날 밤,태풍의 죽은 커브를 돌았다'며 비약적인 상상력을 보여준다. 날카로운 빛으로 순식간에 지구의 중심까지 날아가 박히는 화살 같다. 시집 첫 페이지에 나오는 '케익'은 삶과 사물의 본질을 곧바로 꿰뚫는 시다. '커다란 케익을 놓고/우리 모두 빙 둘러앉았다/누군가 폭탄으로 된 초를 꽂았다/케익이 폭발했다/우리는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그리고/뿌연 먼지 기둥으로 피어오르는 폭발물을/잘라서 먹었다' 부드러운 케이크와 폭발성의 초. 그 곁에 빙 둘러앉은 '우리'는 뇌관의 핵에 '불'을 붙이고 그 파편(케이크)을 잘라 먹는다. 이것은 복잡한 세계를 가장 단순화시키는 과정이자 존재의 근본 의미로 접근하는 지름길이다. 그는 다소 '파괴적'이거나 '해체적'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사실은 고전주의자라고 말한다. 형식의 파괴나 외양의 실험보다 문장의 단단함,의식의 명징함을 중시한다. '나무를 베면 나무 뒤에서/숲은 어두워지고 넓어진다/숲은 거대한 검은 날개를 펼쳐든다'('벌목꾼들' 중) 이 작품은 나무와 숲,그 뒤의 검은 배경으로 확장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수직의 나무'를 더 밝게 비추는 효과를 가져온다. 사람들이 나무를 세우는 모습을 보고 '풀밭을 들고 있는 푸른 기중기들을 수직으로 세우고 있다'고 표현한 것도 그렇다. 그는 삶의 울타리를 뚫고 기둥의 뿌리로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을 알고 있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